김완중 前 호주대사

미주 지역 독립 유공자 심사 때마다 “미국에 피난 간 사람에게 왜 훈장을?” 폄하하는 일 반복돼
세계 최대의 LA 코리아타운은 우연의 산물일까? 미국 이민의 첫 시작은 1903년, 사탕수수 농장 일꾼으로 하와이에 도착한 한인 7천여 명 중 일부가 캘리포니아로 이동해 정착하면서였다.
이를 계기로 샌프란시스코에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대한인국민회와 독립 혁명단체인 흥사단이 창설되어 무형의 임시정부 역할을 하면서 해외 독립운동의 산실이 된다.
현재까지 국가보훈처가 발굴한 미주 지역 애국지사는 멕시코와 쿠바를 포함해 2백 명이 훨씬 넘는다.
문제는 이들의 후손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1903년 이후 후손들이 5세에서 6세까지 내려오면서 자신들의 선조가 독립 유공자라는 사실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어서다.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된 이종근 선생의 후손도 마찬가지였다.
이종근 선생은 2·8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11명의 민족 대표 중 한 분이었는데, 추서된 지 무려 28년이 지나서야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후손을 찾아 훈장을 수여할 수 있었다.
이처럼 2018년부터 1년 동안 캘리포니아에서만 찾아낸 독립 유공자 후손이 열여섯 가족이나 되고 후손들의 대한민국 국적 회복은 42건에 달한다.
LA 총영사관은 국가보훈처와 함께 매년 펜들턴에 있는 해병 1사단 인천상륙작전 기념식에 참석해 고마움을 전하고, 미군 참전용사를 찾아내 ‘평화의 사도’ 메달도 전달해 오고 있다.
마침 LA 카운티 다음으로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오렌지카운티에서도 18명의 한국전 참전용사에 대한 ‘평화의 사도’ 메달 전수식이 거행되었다.
이들 18명은 나중 미국 연방의원이 된 오렌지카운티 슈퍼바이저 미셀 박 스틸 사무실과 협력해 찾아낸 참전용사들이다. 그중에는 화교 출신 이수해 씨도 있었다.
이수해 씨는 한국전에 국군으로 참전했던 200여 명의 화교 출신 중 미국 내 유일한 생존자다.
삶의 터전이던 대한민국이 전쟁의 참화에 휩싸이면서 선택의 여지 없이 길거리에서 징집되어 국군 장병으로 복무했다고 한다.
이후로도 한국에서 40년을 살다가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대한민국 국적이 없다는 이유로 국가유공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애국지사의 꿈>을 펴낸 민병용 한인 역사박물관장이 국가 공적 심사 위원으로부터 전해 듣고 책에 소개한 일화는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한다.
미주 지역 독립 유공자 심사 때마다 “미국에 피난 가 있던 사람들에게 왜 훈장을 주느냐? 그 사람에게 신변의 위협이 있었느냐? 모두 일제 식민 통치 아래서 사선을 넘나들 때 어디 있었느냐?”라고 반문하는 심사 위원들이 부지기수라는 얘기였다. 그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