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경 사회복지학과 교수
아파트 평수 늘리면서 뿌듯했던 마음, 승진의 짜릿함…
하지만 죽을 때 이 순간 떠올리며 미소 지을까?

“요즘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가 그동안 너무 돈, 돈 하며 삭막하게 살아온 건 아닐까. 죽을 때 떠오르지도 않을 그런 것들보다 죽을 때까지도 떠오를 그런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가졌더라면…” 은퇴와 후회에 관해 얘기하려 하는데, T씨(57세)와의 대화는 자꾸 ‘죽음’에 관한 것으로 흘러갔다.
그가 물었다. “교수님은 죽을 때 어떤 광경이 떠오를 것 같으세요?” 순간 나는 당황스러웠다.
내가 잘했던 일이나 인정받았던 순간들? 아니면, 내가 여행했던 도시들의 멋진 거리 모습이 생각날까?
한참 만에 대답했다. “흔히 볼 수 있는, 추수가 끝난 가을 들판이라든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한복 치마 색깔처럼 붉게 지던 노을, 하얗게 흘러가던 강물 같은 것들이 떠오를 것 같아요”
내 대답에 그는 반색했다. “저도 어릴 적 툇마루에 앉아서 햇볕을 쬐던 기억, 아버지랑 낚시 갔던 일, 혹은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를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는 궁금했다. “그런데 왜 죽을 때 어떤 광경이 떠오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나요?” “은퇴하고 나서 시간이 많아지니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정말 행복했던 걸까 돌아보게 돼요.
아파트 평수 늘리면서 뿌듯했던 마음, 동료를 제치고 승진했을 때의 짜릿함, 남들한테 으스대고 자랑하고 싶은 기분… 하지만 죽을 때 경쟁에서 이겼던 순간을 떠올리면서 미소 짓는 사람이 있을까요?”
T씨의 말에 제프 딕슨의 ‘우리 시대의 역설’이라는 글이 떠올랐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갖고 싶었던 시계를 사면 며칠 행복하지만 여행을 다녀온 사람은 오래오래 그 추억을 음미하면서 즐겨
그의 후회는 이어졌다. “생각해 보니까 그동안 너무 물질에 집착하며 살았어요. 아파트 평수 늘리는 재미로요. 이사를 한 열 번쯤 했는데 이사할 때마다 아파트가 커진다는 게 얼마나 신기하고 기분 좋던지, 그때는 그게 행복인 줄 알았죠. 참 어리석었어요. 큰 아파트 마련하느라 식구끼리 오붓하게 여행 한번 못했거든요. 부부끼리 해외여행 한번 못 간 집은 아마 우리 집뿐일 겁니다. 참 안타까워요. 만약에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식구들하고 죽을 때까지 기억에 남을 추억을 쌓는 데 돈과 시간을 쓰겠어요”
돈은 ‘얼마나 가졌느냐’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다. 최근의 많은 연구들은 ‘물질’이 아닌 ‘경험’을 소비할 때 훨씬 행복하다고 주장한다. 경험적 소비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누군가와 영화를 보거나 여행하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오래도록 남는 반면 물건을 소유하기 위한 소비는 한순간 반짝이는 행복감만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갖고 싶었던 시계를 사면 며칠은 행복하지만 그 기쁨이 한 달, 두 달 계속되지 않는 반면 여행을 다녀온 사람은 오래오래 그 추억을 음미하면서 즐길 수 있다.
또 경험적 소비가 주는 만족감은 나만의 것이기 때문에 남들과 비교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아무리 좋은 시계를 샀다 한들 더 좋은 시계, 더 비싼 시계를 가진 사람과의 비교는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제주도 여행한 사람의 행복감과 경주에 다녀온 사람의 행복감을 비교할 수 있겠는가.
여행뿐일까? 좋은 책 한 권을 읽었을 때의 기쁨과 감동적인 영화 한 편을 본 사람의 행복감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흐릿하고 완벽하지 못한 기억력도 경험적 소비의 행복감을 더해준다. 너무나 고달프고 힘들어서 “이런 거 다시는 하나 봐라” 별렀던 어떤 순간이 문득 아름답게 소중하게 떠오르며 “아, 그때 참 좋았지” 하며 혼자 중얼거릴 때가 있다.
알랭 드 보통은 말한다. 진짜 부유한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밤하늘 별 아래에서 경이로움에 소름이 돋는 사람이라고 인생의 풍요로움이란 결국 감수성과 감성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다.
행복하고 싶은가?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싶은가? 그렇다면 물질보다 경험을 소비하라.
한혜경 사회복지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