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데나 최선 다하지 않았더라면

100세 시대 1000명 은퇴자들의 ‘후회’

한혜경 사회복지학과 교수

앞만 보고 달려왔다

“후회요? 아무 데나 최선을 다한 점이죠” 은퇴 후에 가장 후회하는 일을 묻는 말에 대한 P씨57세의 대답이었다.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최선을 다한 걸 후회한다고? 하지만 그는 ‘최선’이 아니라 ‘아무 데나’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

“직장 다닐 때 술자리마다 빠지지 않았어요. 잔소리하는 아내한텐 ‘술자리에서만 오가는 고급 정보를 놓치지 않으려면 그래야 한다’고 큰소리치곤 했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정보야 넘치도록 많았지만 주로 영양가 없는 것들이었어요. ‘이번에 누가 물 먹는다더라, 누가 누구와 불륜이라더라’ A 플러스 급 정보는 술자리에 떠돌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데 엄청 시간이 걸린 셈이죠”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술자리에 열심히 참석한 것이 왜 후회되는 것일까?
“은퇴하고 보니까 내 딴엔 열심히 한다고 한 것들이 다 쓰잘데없는 것들이었어요.

엉뚱한 데 시간과 노력을 들이느라 정작 소중한 걸 놓쳐버렸죠. 일에 올인 하다 보니까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이 너무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할 말도 없고, 뭘 하며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할지 너무 막연하고… 더 중요한 건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너무 없었다는 점이에요.

나한테 무엇이 최선인지 생각해 보는 일 없이 그냥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려왔으니, 지금 멍할 수밖에요. 은퇴하면서부터 머릿속이 하얘진 것 같아요”

‘아니요’ 말하는 기술 정말 중요해 ‘가슴 두근거리게 하지 않는 것’은 과감히 버리고
아무 데나 최선을 다하는 건 이제 그만!

더 자주 거절하고, 더 많이 버렸어야…

아무 데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 중에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착한’ 사람이 많다. 또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유형도 많다. P씨는 자신이 바로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시간은 빨리 흘러가는데, 누가 부탁하면 그 일부터 해줬어요.

물론 다른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하지만 내 딴엔 남보다 더 나은 실적을 올리려면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일이 너무 과중하니까 실적이 오르기는커녕 벼랑으로 떨어졌어요. 결국엔 다른 사람들도 실망시키고, 나 자신도 기진맥진 지쳐버린 거죠.

‘아니요’라고 말하는 기술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실감했어요. 부탁받은 일은 물론이고, 내 일도 마찬가지예요. 그 일을 할 만한 시간이나 실력이 부족할 때, 다른 사람한테 위임하는 기술도 필요하더군요”

그는 자신이 ‘버릴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고도 했다. “모든 걸 끌어안고 있어야 마음이 편해져 ‘나중에 혹시 필요해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 때문에 뭐 하나 버리지 못하고요.

얼마 전에…

한혜경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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