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윤학

20여 년 전 여름 뉴욕에 간 나는 자동차를 렌트했다. 렌트카를 주차할 때마다 땡볕 아래 요금을 징수하는 주차원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게 된다. 거의 남미계 스패니시인 그들이 고향을 떠나오며 품었을 꿈을 생각하니 애처롭기도 했다.
비좁은 주차 정산소 안에서 더위와 싸우며 무료하게 지낼 그들이 책이라도 읽는다면! ‘그래! 영어와 스페인어로 책을 만들어 저들에게 보내주자’
잊고 있던 꿈을 떠올리는 그들의 희망찬 얼굴이 그려졌다. 세계 온갖 인종이 섞여 있는 미국에서 필자를 찾아 먼저 영어로 책을 내고 그걸 번역하여 스페인어판을 만들기로 했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뉴욕에 머물 집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졌다. 다행히 뉴욕은 렌트 천국이었다. 초고가 콘도부터 저가의 셰어하우스까지 계약기간도 천차만별인 월셋집이 나와 있었다. 사진으로만 봐도 너무나 멋스러웠다. 높다란 천장과 커다란 창문, 탁 트인 전망, 모던한 싱크대와 화장실… 그런 집에서 살아볼 상상을 하자 내가 마치 맨해튼을 산책하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했다.
머물 집 찾는데 뉴욕은 렌트 천국 초고가 콘도부터 저가의 셰어하우스까지 천차만별
한국인이 많은 퀸즈나 뉴저지도 알아보다가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일하려면 도심인 맨해튼에 머물기로 했다.
‘아치스톤’이라는 거대 주택임대회사가 다양한 가격의 수많은 임대 물건을 가지고 있어 내 형편에 맞는 집을 고르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첼시에 1베드룸 콘도를 구했는데 젊은 직장인 부부와 아이들 천국이었다. 월가나 5번가에 직장을 잡은 젊은이들이 월급에 맞는 집을 구해 전철 한번 타거나 걸어서 출퇴근했다.
집만 나서면 생필품점이며 옷 가게, 레스토랑이 늘어서 있어 물건 하나 사려해도 우리처럼 우는 아기를 카시트에 홀로 태운 채 멀리 차를 몰 필요가 없었다.
한번은 콘도 안 유아방을 둘러봤다. 꼬마들은 즐겁게 모여 놀고 젊은 엄마들은 티타임을 즐기고 있어 참 평온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도심에 모여 사는 장점이 확 눈에 다가왔다. 나는 첼시에 살면서 틈만 나면 작은 갤러리부터 대형 미술관까지 차 없이 걸어 다닐 수 있었다.
서울에서는 책방 한번 가려 해도, 공구 하나 사려해도 차를 몰고 나가 주차 전쟁으로 진이 다 빠지지 않던가. 집 밖이 바로 공연장, 레코드 가게, 서점, 도서관, 공원이라 차 없이도 활발하게 살 수 있는 맨해튼과 점점 더 친해졌다. 차를 탈 필요가 없으니 비싼 주차비도 걱정 없었다.
우리는 서울 도심은 그대로 놔두고 외곽으로 외곽으로 아파트를 늘려간다. 직장인들은 외곽에 집을 얻고 하루 몇 시간씩 출퇴근에 허비하느라 아이들과 놀아줄 시간도 없이 고달프다.
그래서 외곽보다 살기 편한 강남의 집값은 치솟고 빈부격차는 더 커간다. 하지만 강남의 고가 아파트에 살아도, 벤츠며 BMW며 수억의 자동차를 타도 삶의 질은 맨해튼의 렌트족보다 떨어지지 않는가. 그림 한 점, 뮤지컬 하나 보려 해도, 외식 한번 하려 해도, 아니 전구 하나 사려해도 빵빵거리는 소음 속을 운전하고 나가 주차 전쟁까지 치러야 한다. 왜 우리는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림을 보러 가거나 아이들 색연필을 사러 가는 맨해튼의 젊은 렌트족과 수십억 아파트와 수억의 승용차를 가진 강남의 부자 중 누가 더 삶다운 삶을 누리고 있는가.
뉴욕 젊은 직장인 도심에 집 구해 걸어 출퇴근 서울은 도심 놔두고 외곽에서 몇 시간씩 출퇴근
돈 버느라 일 년 내내 미술 전시 한번 안 보고 음악회 한번 가지 않고 책 한 권 읽지 않으면서 스마트폰으로 정보만 찾아대는 부자는 부자가 아니라 가난뱅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가난뱅이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려 한다. “값비싼 집에서 너희만 잘살면 되느냐” 질책한다. 집과 자동차만 크면 부자란 말인가. 대통령은 그런 가난뱅이들까지도 어떻게 진정한 부자로 만들지 가슴으로 고뇌하며 밤잠을 설쳐야 한다.
우리도 뉴욕처럼, 도쿄처럼 도심을 직장과 주거지가 가까운 직주근접 도시로 만들어가야 한다. 도심 개발은 어렵지 않다. 뉴욕이나 도쿄처럼 용적률만 올려주면 된다.
그러면 땅 가진 사람만 더 부자가 된다고 배 아파하는 사람들로 여론이 들끓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땅을 혼자 전부 사용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그 땅에 맨해튼처럼 렌트 아파트나 건물을 수없이 지을 것이다. 그들은 더 부자가 되겠지만 염려할 필요가 없다. 엄청난 상속세로 거둬들이지 않는가. 우리 상속세는 3대만 가면 국가 것이 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배 아파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장려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건물 짓느라 머리 아프게 고생만 하다가 가는 인생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들의 돈과 수고로 지은 건물에 우리 젊은이들이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뉴욕처럼 문화적인 삶을 영위할 모습을 그려보자. 그걸 보며 건물을 지은 그들도, 그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뿌듯하지 않겠는가.
도심에 문화 시설과 국제학교 살기 좋은 아파트 들어서면 강남 집값은 자연스레 사그라들 것
도심에 살기 좋은 렌트 아파트가 들어서면 강남의 집값은 자연스레 사그라들 것이다. 도심 곳곳에 도서관과 실력파 학원, 국제 학교가 생기고 최고의 음향을 갖춘 음악당, 온갖 작품이 전시되는 갤러리가 들어설 것이다. 그러면 삭막한 아파트만 빽빽한 강남에 누가 굳이 살려고 하겠는가. 강남보다 더 살기 좋은 도심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강남만 때려잡으면 집값도 내려가고 빈부격차도 줄어들까? 다주택자들만 없어지면 우리 모두 집을 가질 수 있을까? 오히려 임대 가능한 매물들이 줄어들어 전셋값, 월세만 오르지 않을까. 그동안 전셋값이 오르면 또 집값이 오르는 걸 수없이 지켜보지 않았던가.
서울의 한정된 집으로 집값을 잡으려는 것은 시지푸스의 신화처럼 헛된 수고다. 공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리 끌어내리려 해도 일시적으로 내릴 수는 있지만 결국 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주택 전문가들은 공급을 늘리는 것이 답이라고 해결책을 제시해 왔다.
나는 그 해결책이 도심 개발이라고 믿는다. 강남보다 훨씬 넓은 종로구, 동대문구, 서대문구, 용산구를 맨해튼처럼 수십 층으로 개발한다면 우리도 후개발이익의 덕을 보며 맨해튼보다 훨씬 더 쾌적하고 문화적인 도시에서 살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진정 잘 사는 길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생각의 집’부터 짓는 국민들이 늘어나야 ‘몸의 집’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발행인 윤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