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달파 선생의 인생찬미

고학찬 전 예술의 전당 사장

‘장수만세’에서 고달파 선생으로
중학교 2학년 열다섯 나이에 제주도 섬을 떠난 이후 서울로 하와이로, 뉴욕으로 수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나는 살면서 편안하게 그냥 지내는 것보다는 뭔가 고달프게 움직이면서 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흔한 말로 고생을 사서 하는 게 내 스타일이었지요.
대학 졸업하고 TBC 방송 PD가 됐어요. PD 생활을 하면서도 선배들 하는 대로 그냥 하면 되는데 남들이 안 해본 것을 해보려고 기를 썼지요. 뭔가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하면 인생이 고달파지는 게 방송의 속성인데 내 체질에 딱 맞더라고요.
TBC ‘장수만세’라는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전국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출연하겠다고 줄을 서서 몰려왔으니까 가만히 앉아서 출연할 사람들 뽑아 녹화하면 되는 프로지요.
그런데 나는 더 재미있는 분은 없을까 하고 온 시내를 돌아다니고 동사무소를 다 뒤졌어요. 그랬더니 동료 PD들이 “참 고달프게 프로그램을 한다”면서 호를 지어줬는데 ‘달파 선생, 달파 선생’ 그랬지요. 성이 고씨라서 ‘고달파’입니다.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나면 또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거든요.

고달파 선생, 뉴욕에 가다
어렸을 때 섬에서는 항상 바다밖에 안 보이니까 ‘빨리 저 바다를 넘어 더 넓은 세계로 나가야 되겠다’ 했지요.
1980년에 TBC가 통폐합되면서 KBS로 가라고 했는데 나는 대신 하와이로 이민을 갔어요. 아름다운 해변과 어여쁜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먹을 것도 많은 지상낙원이더라고요. 그런데 한 열흘 지나니까 슬슬 지겨워졌어요.
집사람한테 “우리 보따리 싸서 뉴욕 가자” 했더니 집사람이 놀라면서 “뉴욕에 가면 누가 있어?” 하고 물어요.
내가 “모르겠어. 그런데 거기도 사람이 살 텐데 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마누라와 딸아이 셋을 데리고 뉴욕 공항에 내렸는데 진짜 막막하더라고요. 맨해튼 42번가 그레이하운드 터미널에서 짐을 내렸지만 더이상 갈 데도 없고 날만 어둑어둑해지고 있었어요. 포르노극장, 마약쟁이, 범법자들이 우글대는 곳이었어요.
아는 데도 없으니까 그 보따리 위에다가 애들 셋을 하나씩 앉혀놓고 하염없이 42번가 길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애들이 불안해하는 겁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건가?’ 하면서 내 눈치만 슬슬 봐요. 어디 가자는 말도 안 하고 한 2시간 동안 그냥 앉아만 있었어요.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이 거짓말처럼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아는 친구가 지나가다가 나를 본 거예요. 연락도 없이 그냥 갔는데 그렇게 친구 집에서 뉴욕 생활을 시작하게 됐지요.

“보따리 싸서 뉴욕 가자” 하니 아내가 “가면 누가 있어?” 맨해튼 터미널에 내려 보따리 위 애들 셋 앉혀놓고

메뉴판 중국 발음 외워 중국집에 취직
그런데 그 동네는 백인 동네라서 나 같은 유색인종은 어디 취직할 데가 없더라고요. 돌아다녀 보니까 중국집이 있어 동양 사람이니까 날 써주겠다 싶었는데 안 된다는 거예요. 중국말을 할 줄 알아야 한대요.
그래서 내가 “손님이 전부 백인들인데 웨이터가 무슨 중국말이 필요하냐?” 하니까 주방 사람들이 영어를 모르니까 주문을 중국말로 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취직을 못하면 애들이 굶어 죽게 생겼거든요. 친구 집에 얹혀사는 것도 하루이틀이잖아요. 그래서 매니저한테 “메뉴판에 중국말 발음을 다 적어 달라. 내가 하루 공부해서 올 테니 내일 테스트해 봐라”
그다음 날 테스트를 받고 중국집 웨이터가 됐어요. 그런 식으로 하니까 뭐 안되는 게 없더라고요.
이렇게 웨이터, 바텐더, 옷 가게 종업원, 프리마켓도 하며 참 재미있게 살았어요. 프리마켓이란 벼룩시장인데, 가게 얻을 돈이 없으니까 물건을 봉고차에다 싣고 행상처럼 다니는 겁니다. 오늘은 뉴저지 시장, 내일은 잉글리시 타운, 모레는 롱아일랜드 이런 식으로 장사도 해봤지요. 장사하면서 배운 게 참 많습니다.
한국에서는 술 먹으러만 다녀봤지 바텐더로 일해본 적은 없었잖아요. 그런데 손님으로 갔을 때의 술집과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술집은 전혀 다릅니다. 바텐더가 술 먹으러 온 사람을 보는 시각과 내가 술을 먹으러 가서 바텐더를 보는 시각은 전혀 다른 거지요.

유색인종은 일할 데 없어 중국집 갔더니 중국말 알아야 한대서 중국말 메뉴판 달달 외워 중국집 웨이터로

힘든 일을 한다는 생각보다는 새로운 생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나 기뻤어요.
33세에 뉴욕에 있는 한국 술집의 웨이터 일을 시작했는데 주급 말고도 팁이 있기 때문에 벌이가 괜찮았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저를 불러 안주 한 접시를 주면서 저 방 VIP 고객들에게 “사장님의 특별서비스다” 하라는 거예요. 안주를 갖다 놓으면서 손님들을 딱 보니까 미국 유학 온 고향 친구도 있는거예요. 모두 아주 쟁쟁한 친구들이었는데 그중에는 재벌 아들도 있어서 그 술집에서는 최고로 대우를 하더라고요.
그 친구들이 나를 보더니 “아니, 고학찬이 네가 여기에 웬일이냐? 그 잘나가던 PD가 웨이터라니” 막 난리가 났어요. 친구들이 사장을 부르더니 내가 대단한 사람이니까 잘 모시라는 겁니다.
친구들이 돌아가자 사장이 나를 부르더니 “죄송하지만…

고학찬 전 예술의 전당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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