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희 수필가, 前 교사
재수학원 개강 첫날 국어 시간. 종이 치고 5분이 넘어도 선생님은 오지 않았다. 얼마 후 문이 힘없이 열리며 60이 거의 다 된 노인이 꾀죄죄한 바바리코트를 입고 들어왔다.
‘아니, 수업하러 오며 코트를 입고 오다니, 그것도 늦게’
그는 코트도 벗지 않은 채 얘기했다. “자네들 이번 시험에서 국어 망쳤지? 왜 시험 못 봤는지 알아? 난 알지. 자네들이 학교 12년 동안 독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래. 1년 동안 그 독을 빼줄 거야” “독이라니요?” “너희 국어책에 새까맣게 적어 놓은 거. 그게 독이야”
우리는 이 초라한 노인의 말에 의아해했지만 일단은 공부하는 게 급해 서둘러 교재를 폈다. 그가 엮은 책이었다. 아무 해설도 풀이도 없는 어려운 글들이었다. 우리는 연필을 들고 받아 적으려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자네들 연필은 왜 드나?” “풀이 적으려고요” “아니 나보고 자네들에게 독을 먹이라고? 난 너희가 먹은 독을 해독시킨다니까. 자, 그럼 해볼까? 1과는 논설문이군, 읽어봐”
우리가 그 글을 읽는 20여 분간 그는 자리에 앉아 수첩과 소지품을 다 꺼내놓고 뒤적이며 정리하더니 그것도 지루한지 일어나 창밖을 보다가, 복도에도 나갔다 들어왔다.
“다들 읽었어? 어렵지? 자 그럼, 이제 요약해 봐” “설명 안 해주세요?” “나보고 독을 달라고?”
그는 이제 아주 복도에 나가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본다. 거의 다 된 듯하자 “다 했지? 그럼, 1과 끝” “선생님의 모범 요약문을 읽어주세요” “내가 왜? 난 시험 안 봐, 자네들이 시험 볼 거잖아. 난 이 글 잘 몰라” 우리는 너무나 기가 막혔다.
그렇게 두 과를 끝내고 종이 울리자 선생님은 나갔다. “아니 뭐 저런 선생이 있어?” 여기저기서 화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얼마 후 시詩 단원이 시작되던 날, ‘시는 가르치겠지’ 했던 우리의 기대대로 시가 나오자 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시네? 서정주의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나를 기른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 “잘 썼다, 잘 썼어. 역시 서정주야! 좋지? 제군들도 좋지?” 그는 기쁨에 들뜬 목소리로 몸을 흔들며 시 전문을 읽었다. 나는 속으로 ‘아니 뭐가 그리 좋다고 저럴까’ 그의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며 나는 어렴풋이 시의 비밀이 궁금해졌다.
주제, 함축적 의미 등 설명을 적으려는 우리의 기대를 깬 채 그렇게 시 수업은 끝이 났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우리는 대표를 뽑아 원장실로 보냈다. “국어 선생님 바꿔주세요” “그런 소리 마. 얼마나 잘 가르치는 분인데” 하며 아무 조치도 취해주지 않았다. 결국 국어 시간에 열 명만 남았다. 그들도 수업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용기가 없거나 달리 돈을 더 낼 수 없어서였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우리는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는 그를 원망하며 이해도 되지 않는 그 많은 글을 혼자 읽고 요약했다. 우리는 그를 멸시하고 그의 차림새까지 미워했다.
그렇게 일 년이 가고 대학입학 시험 날, 이게 웬일인가. 작년에는 손도 못 대던 문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