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이 지켜봐

김재연 前 KBS PD 국장

겨울인데도 머리에서 김이 나도록 땀 흘려 일한 P의원의 공사 현장

<체험 삶의 현장>은 유명 인사의 1일 노동 체험을 통해 재미와 감동을 전하는 프로그램이다. 난생처음 겪어 봤을 노동 현장에 간 출연자의 실수담이 자연스럽게 웃음을 유발한다. 프로그램 성공의 결정적 요소였다.

사실 고된 노동에 반발하는 출연자가 나올 거라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나에겐 출연자를 의도한 대로 부릴(?) 수 있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불가능은 없다, 하면 된다’는 구호를 제작진 마음에 새기고 죽을 각오로 일했다.
‘누구를 섭외해 어디로 보내 고생을 시키나’ 될 수 있으면 일하는 시간은 길게, 들어서 옮기는 것은 무거울수록, 발로 뛰는 것은 멀수록 좋았다. 명사들의 뻣뻣한 척추는 내려 앉혀야 하고, 가수들의 고운 목소리에서 숨 가쁜 소리를 뽑아내야 하며, 탤런트들의 고운 얼굴에선 진한 땀방울을 받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첫 촬영, 섭외된 인물은 당시 모 정당의 P국회의원이었다. 정치인의 권위의식에서 나온 돌발행동에 노련하게 대처해야 해 촬영 현장은 내가 직접 지휘하기로 했다. P의원과 함께 찾아간 현장은 지하철 건설 현장이었다.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지하 35미터 아래 작업장에서 온종일 터널을 뚫는, 숙련된 노동자도 감당하기 힘든 현장이었다.
P의원은 전혀 노동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노동자들 격려차 현장에 들른 정치인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는 수행 비서까지 거느리고 왔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작업이 시작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비서는 자꾸 카메라 앵글 속으로 들어와 손수건으로 ‘어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려 했다.
참다못한 내가 소리 높여 촬영 중단을 선언했다. “잠깐!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당장 나가세요” 비서는 계속 딴청을 부렸지만 P의원이 비서에게 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국회의원의 현장 체험 첫 촬영, 함께 일할 노동자들 은밀히 불러 ‘말단 부하로 보고 제대로 부리세요’

혼자 남은 P의원은 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은 봐주는 법이 없었다. 촬영에 앞서 나는 몇몇 근로자를 은밀히 불러 “그분은 오늘만큼은 정치인이 아닌 겁니다. 말단 부하쯤으로 보시고 제대로 부리세요” 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P의원이 나에게 다가왔다. “이봐, 김 차장! 이제 그만 찍으면 안 되겠나? 어차피 시청자들은 분간하기 힘들 테니, 오전에 촬영한 걸로 적당히 편집하면 될 거 아닌가?”

나는 예상했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spot_img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beautiful)

데스 브로피 Des Brophy 화가 가난 속에서도 어머니는 음악이 있으면 우리와 함께 항상 춤을 췄죠. 제 그림 중에 춤추는...

결혼도 공부해야?

이유민 의사 강의를 듣고 처음으로 ‘아, 결혼이 좋은 거구나. 나도 결혼을 해야겠어’하는 생각이… 직장생활을 하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와 졸업 후 바로...

실컷 울고 실컷 웃는 무대를!

나의 예술 이야기 홍신자 무용가 감정에 충실한 나에게도 더 잘 울기 위한 연습이 필요했던 때가 있었다.<제례>라는 작품을 만들기 전까지, 나는 언니에...

교장실에 전교생 사진 붙여놓고

이준원 前 덕양중 교장 교장으로 부임한 첫 학교를 하필 폐교 위기의 학교로 선택하셨다면서요? 덕양중학교에 부임하던 첫 출근길이 아직도 생생해요. 학교로 가는...

그 길로 짐을 쌌다

박선민 방송작가 수술을 며칠 앞두고 서울로 오신 아버지는 늘 그러셨듯 내 오피스텔 구석구석 대청소를 해주셨다. 혼자 있는 딸이 혹여나 불편할까...

관련 기사

《가난한 방송》 단박에 시청자 사로잡아

김재연 前 KBS PD 국장<도전하고 질문하고 의심하라> 저자 방송에 입문한 지 15년째 되던 해였다. 당시 나는 새로운 기획을 찾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회사는 물론 후배들까지 내...

<가난한 방송> 단박에 시청자 사로잡아

김재연 前 KBS PD 국장<도전하고 질문하고 의심하라> 저자 방송에 입문한 지 15년째 되던 해였다. 당시 나는 새로운 기획을 찾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회사는 물론 후배들까지 내...

기생에게 ‘여사’ 존칭?

김재연 前 KBS 국장 형님은 사극 연출가로 승승장구하면서도 오래도록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 기저에는 젊은 날의 트라우마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아버지는 경성방송국 초대 아나운서였다....

고물상 할머니의 진실

김재연 前 KBS PD 국장 “며칠은 굶은 것처럼 깡마른 할머니가 신문지를 팔고 라면을 하나 사려고 합니다. 설탕물만 먹은 것 같은 할머니는 라면 하나를 사 옵니다”고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