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민 방송작가

수술을 며칠 앞두고 서울로 오신 아버지는 늘 그러셨듯 내 오피스텔 구석구석 대청소를 해주셨다. 혼자 있는 딸이 혹여나 불편할까 봐 시계며 현관문 건전지까지 미리 다 갈아 놓으시고 쓰지 않고 내버려둔 만년필에 잉크까지 채워주셨다.
아버지가 병원으로 가신 날, 내 책상 위엔 만년필로 꾹꾹 눌러쓴 메모가 놓여있었다.
‘사랑하는 내 딸. 좋은 사람 만나서 시집가거라. 너무 늦기 전에, 올해엔 꼭!’
방송작가였던 나는 의학 다큐멘터리 원고를 쓸 때마다 ‘청천벽력 같은 암 선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뭐 이런 상투적인 표현 말고는 없을까 늘 답답했는데 막상 내 아버지가 암에 걸리니… 딱 그 표현 그대로였다.
의학 다큐 때 ‘청천벽력,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상투적 표현이라 했는데 막상 아버지가 암 걸리니…
검사 결과를 전하는 수화기 속 담담한 목소리 뒤로 용기를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늙은 아버지가 느껴졌다.
그 길로 짐을 쌌다. 준비 중이던 다큐멘터리며 새로 시작하기로 했던 일들이 문제였지만 감사하게도 모두 위로를 건네며 배려해 주어 정리를 잘할 수 있었다. 고향 가는 길이 이렇게나 멀었나. KTX 안의 사람들이 울먹이는 나를 흘끔거렸다.
항암치료를 받기까지 남은 한 달, 나는 매일 아버지를 이끌고 산에 올랐다. 아침잠이 많던 나였는데 아무리 울다 잠들어도 새벽 5시만 되면 눈이 번쩍 뜨였다.
식도암으로 방송에 출연한 사람들을 죄다 찾아 전화를 돌려 뭘 먹었는지, 어느 병원 어떤 의사의 치료가 좋았는지도 묻고 관련 논문도 찾아 읽었다. 생존율 20%, 수술 이후 예후가 가장 나쁜 암… 이 절망적인 통계치에서 아버지를 끄집어내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혹시나 아버지가 암에 관한 나쁜 뉴스라도 보고 우울함에 빠질까 봐 24시간, 화장실 앞까지 쫓아다녔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웃게 할 수 있을지 그것만 생각했다. 아버지만 좋아진다면 그토록 바라시는 시집도 갈 것이라고, 내가 뭔들 못 하겠냐고 어릴 때처럼 방긋방긋 세상에서 제일 잘 웃는 딸이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의지가 강한 분이셨다. 항암치료와 수술, 방사선치료 세 가지를 병행하는 동안 단 한 번도 힘들다고 말씀하지 않았다. 수술 후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중에도 오히려 만삭의 간호사를 보고 안쓰러워하며 격려와 농담을 건네셨다.
폐, 식도 환자들의 기침 가래 소리가 들끓는 병실에서 간신히 눈을 붙인 아버지를 확인하면 1층 로비로 내려가 담요를 뒤집어쓴 채 잠에 빠졌다. 하루하루가 바빴고 시간은 의외로 잘 갔다.
함께 병동에 계셨던 분 중 중단 없이 치료를 마친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몇 분은 치료를 포기하고 요양을 가셨고, 몇 분은 돌아가셨다. 어떤 학교 선생님은 수술 후유증으로 목소리를 잃으셨다.
햇반과 김치만 겨우 삼키고 있는 내게 밑반찬을 나눠주던 어머니들… 갑자기 울음이 터져 병원 구석으로 뛰어가면 이미 누군가가 눈코가 빨개진 채로 전화를 붙들고 울고 있었다. 혹시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될까 봐 매 순간 두려웠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그 6개월의 병원 생활은 그동안 살면서 부녀간에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고 함께 웃었던 시간이었다.
유복자로 태어나 고생하신 아버지는 “너희 엄마와 결혼해 삼 남매를 낳은 일이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이다. 그러니 너도 꼭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병원 창밖을 바라보는 아버지를 보며 나도 생각했다. 이처럼 따뜻한 분을 나의 아버지로 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리고 내 인생 최고의 결정은 일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 곁을 지키기로 한 것이었다고.
아버지는 눈에 띄게 건강을 회복하셨다. 나는 다시 일을 시작했고, 간병할 시간을 허락했던 내 직업을 더욱 사랑하게 됐다. 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일했지만 더 자주 아버지를 뵈러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독신주의자였던 나는 거짓말처럼 인연을 만났다. 마치 예언처럼 아버지의 메모에 적힌 대로 그 해가 가기 전,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 입장 전 꼭 잡아주던 아버지의 그 커다란 손을, 웨딩드레스를 입은 딸을 그윽하게 바라보던 그 깊은 눈빛을 나는 늘 기억하고 있다.
어느 날, 꿈에서 아버지가 재수술받아야 한다는 통보를 받고 오열하다 깨어났다. 마침 그다음 날은 아버지가 수술하신 지 일 년째 되는 정기 검진일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모든 것이 좋다는 밝은 목소리를 들었다. “우리 딸, 보고 싶고 안아보고 싶다”
오늘 아버지가 무척 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