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에게 ‘여사’ 존칭?

김재연 前 KBS 국장

형님은 사극 연출가로 승승장구하면서도 오래도록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 기저에는 젊은 날의 트라우마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경성방송국 초대 아나운서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방송 인생은 생방송 중에 벌어진 사고로 좌절되고 말았다. 지금 보면 실소가 터져 나오는 단순한 해프닝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 사고는 아버지가 라디오의 판소리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소리꾼을 소개한 멘트 때문이었다.

“오늘은 명창인 김○○ 여사께서 수궁가의 한 대목을 불러주시겠습니다. 자라의 꾐에 빠져 용궁에 갔던 토끼가 다시 뭍으로 돌아와 기뻐하는 장면입니다” 별문제 없어 보이는 이 멘트가 당시 일부 한성 양반 청취자들에게 분노와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이게 방송사고였다니. 문제는 바로 그 소리꾼이 기생이었다는 데 있었다. 요컨대 어떻게 양반 가문의 자제인 아버지가 기생 따위에게 ‘여사’라는 존칭을 썼느냐는 것이다. ‘해라’, 즉 반말로 소리꾼을 소개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신분제도의 낡아빠진 틀과 양반이라는 계급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시대착오적인 사람들이 ‘오피니언 리더’로 불릴 때였다. 그들에게는 신분 고하를 떠나 기생인 소리꾼에게 예우를 갖춘 아버지의 진행 방식이 문제였던 것이다.

명창 김 여사께서 수궁가를 부르시겠습니다” 이게 방송사고라니 시대착오적인 리더들은…

이를 문제 삼은 장안의 양반네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정삼품 벼슬에 올라 정주 고을 원님을 지낸 바 있는 전형적인 양반이었던 할아버지의 신분까지 들먹이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여갔다. 여기에는 개화사상에 심취하면서 양반이라는 신분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독립협회’의 일원으로 계몽운동에 앞장섰던 할아버지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던 듯싶다. 그렇다면 그날 아버지는 그 소리꾼을 어떻게 대해야 했을까? “기생 출신 소리꾼 김○○, 어서 나와라. 수궁가를 부른다고? 어떤 대목이지?” 이래야 했을까?

기생은 연기, 무용, 노래의 재능을 겸비한 예인이었다. 아버지의 존칭은 예술인과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가 아니었던가. 아버지는 사고가 아닌 것을 사고로 단정 짓고 근신을 요구하는 방송국의 분위기에 염증을 느끼고 폐병을 이유로 방송국에 사표를 던졌다. 당시 경성방송국장은 폐병이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한참의 침묵 후에 고개를 끄덕이며 사표를 수리했다. 아버지에게는 양반들의 공격보다 아버지가 그간 존경하며 따라왔던 국장이 아무렇지 않게 사표를 수리한 점이 더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깊은 좌절 속에서도 다른 삶의 길을 모색해야 할 때였다. 아버지는 해방과 더불어 UN 장학생으로 선발돼 영국 런던대에서 사회보장제도를 연구했고 이 분야 최초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사회사업개론>을 저술하기도 했다. 사회보장제도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은 때 아버지는 우리나라에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했던 셈이다.

소리꾼을 여사라 소개해 사표낸 아버지는 묘비에 ‘이 생명 굽은 것을 펴기에 쓰리로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행정 관료로 일하며 보건사회부 차관까지 올랐다. 그 후 1971년 남북회담 때는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으로 진두지휘했고,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뇌성마비 장애인 복지협의회’를 만들어 마지막 날까지 사회복지 분야에 헌신했다. 나의 셋째 형님은 신경이 썩어들어가는 베세씨 병을 앓다가 스물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어쩌면 그 일이 아버지가 사회복지에 여생을 바치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생명과 이 힘을, 눌린 것을 쳐들고 굽은 것을 펴기에 쓰리로다. 부리리로다’ 아버지 묘비에 새겨진 글귀다. 아버지의 철학이 담겨 있다. 만약 아버지가 계속 방송인으로 남았다면 어떤 삶의 행로를 걸어가셨을까? 아버지의 인생을 보면 애초에 우리 삶에 정해진 길이란 없는 것 같다. 우연찮은 계기로 뜻하지 않게 삶의 변곡점을 맞기도 하는 게 우리의 삶이 아닐까.

김재연 前 KBS 국장
<도전하고 질문하고 의심하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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