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버지 진짜 시인이구나”

박일규 시인

나이 47세에 시인으로 등단하셨다면서요! 그 시들은 어떻게 쓰신 거예요?
어릴 적 할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아버지는 학교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지만 할아버지는 장날마다 우리 교실 앞에 와서는 담임선생님한테 ‘저놈이 우리 손자’라고 하곤 하셨죠. 할아버지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나를 아주 인격적으로 대해줬어요.
아버지는 당시 스물다섯밖에 안 된 어린 때라 아마 아들이 좋다 나쁘다 그런 생각조차 못 했을 거예요.

현대문학에 추천한 시인 서정주 착잡한 표정으로 “세상에 시인이 참 많은데 거의 가짜야! 말 가지고 장난들은 잘 치는데”

어머니를 따라 밭에 나가면 어른들이 장에 갔다 돌아오는 고갯길이 보여요. 어느 날은 이 고갯길에 할아버지가 보이는 거예요.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쓴 할아버지가… 밭에 서 있는 나를 알아차린 할아버지가 짚고 오던 지팡이를 버려두고 호주머니에서 뭔가 꺼내시어 입으로 가져가셨어요.
햇빛에 눈부시게 번쩍이던 하모니카… 아마 할아버지는 하모니카를 나에게 사다 주려고 마음먹었던 그때부터 벌써 기쁘기 시작했을 겁니다.
할아버지는 책이 아주 많은 사랑방에서 주로 계셨어요. 그 사랑채 뒤쪽은 왕대밭이 무성해 있었고 앞쪽에는 시누대밭이 무성해서 마치 울타리처럼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 대나무 생울타리 속에 감나무가 서있었어요.

현대문학에 박일규 시인을 추천한 미당 서정주 선생과 함께

그 대밭이 둘러친 사랑방에서 나하고 할아버지랑 자곤 했죠. 목침을 베고 할아버지와 누워있으면 밤에 동녘에서 달이 떠올라요. 달빛이 그 대밭을 비추면 댓잎의 그림자가 방의 하얀 창호지 문살에 이렇게 닿아요.
아름다운 댓잎 수묵화를 그려놓는 것 같아요. 그러면 할아버지는 나에게 “이런 것을 두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다~” 하셨어요. 내가 그때 배우던 책에 있었던 말의 뜻을 되새겨 주시는 거예요. 그 목소리가 지금도 들려오듯 생생해요.
근데 그 할아버지가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황달을 앓으시다가… 나는 치렁치렁한 누런 삼베 상복을 입고 ‘상제의 지팡이’를 짚고 할아버지의 상여 뒤를 따라갔어요. 따라가면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할머니는 “어린것이 무엇을 안다고… 쯧쯧”하며 손수건을 꺼내 내 콧물과 눈물을 훔쳐주었습니다.
나는 이 죽음이라는 것이 땅에 묻힌다는 것인 줄 몰랐어요. 근데 산에 가서 묻히는 걸 보고 많은 생각이 든 거죠.
우리 집 감나무는 항상 언덕진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었어요. 마치 저 멀리 해 떨어지는 석양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죠. 그러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감나무가 ‘저승에도 다녀오는 감나무’로 생각이 된 겁니다.

달빛이 대밭을 비추면 댓잎 그림자가 하얀 창호지 문살에 닿아. 할아버지는 “이런 것을 두고 ‘아름답다’ 하는 거란다”

감나무가 우리는 못 만나는 할아버지하고도 만나 이야기도 나누는 존재처럼 느껴진 거죠. 뭣으로든 안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고 싶고 할아버지의 현존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를 여읜 헛헛함을 채우는데 감나무가 위로 역할을 해준 겁니다.
수십 년이 지나도 그 할아버지의 잔영이, 그림자가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한국에서 사업하며 지낼 때는 그런 내 마음을 돌볼 겨를도 없었어요. 그런데 아들 유학시킨다며 하던 사업 다 정리하고 미국에 나가 식구들과 뿔뿔이 헤어져 보니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 간절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속에만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미국에 가서야 ‘감나무’라는 시로 완성했습니다

그 시를 어떻게 미당 서정주 선생이 알게 되었나요?
국제전화를 통해 딸에게 시를 읽어줬어요. 그 시를 편지로도 부쳤으니 원고지에 잘 정리해서 서정주 선생님을 찾아뵈어라 부탁했죠.
서정주 선생이 읊어보라고 해 딸이 읽었답니다. 들으시던 서정주 선생은 무릎을 치며 “너네 아버지, 진짜 시인이구나!” 하시고는 현대문학에 시인으로 추천해야겠으니 시 몇 편을 더 보내라고 했대요.
그러면서 “세상에는 ‘시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참 많지! 그런데 거의 가짜야! 말 가지고 장난들은 잘 치는데…” 하며 금세 착잡한 표정을 지으셨다고 해요.
저도 그 말을 새기며 한번 사는 인생을 진심을 다해 ‘진짜 삶’을 살아야지, 있는 척, 괜찮은 척, 베푸는 척하며 ‘가짜 삶’을 살지 않으려고 해왔던 것 같아요.

박일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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