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승 김희수

흰물결이 만난 사람
신경호 도쿄 수림학교 이사장

수림학교 부교장 시절 김희수 이사장과

김희수 선생은 한때 도쿄에만 스물세 개 빌딩을, 한국에도 회사와 부동산을 소유해 자산가치만 수조 원에 이르렀다면서요. 유학생 시절부터 그분을 따라다니며 배웠다고 하셨지요
김희수 선생 같은 1세대 재일교포들은 조국애도 대단하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엄청나요. 그러다 보니 자식뻘 되는 한국 유학생들이 좀 애틋하고 짠했던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그들의 생활고를 덜어주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길 바라셨죠. 아마 그런 지원의 일환으로 저희에게도 일할 기회를 주신 것 같아요.
마침 저희를 만났을 즈음, 김희수 선생은 목 좋은 곳에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비즈니스호텔을 하나를 매입하셨어요. 재일 유학생 연합회 회장 정동호 선배가 우직해 보이자 호텔 본부장으로 한번 일해봐라 맡기신 거예요. 그 덕에 선배를 따라다녔던 저도 학부 2학년 때 본격적으로 선생 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죠.

그런데 호텔을 살펴보니 기존에 일본인들이 경영했던 방식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선배와 제가 영업 방식을 조금 바꿔보자고 했죠. 당시 서울 아시안 게임과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기업과 단체들이 일본으로 연수를 많이 오니 그들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영업해 보자고 아이디어를 냈어요.
오후에 수업 마치자마자 출근해서 저녁까지 일하고 주말이면 자동차 하나 빌려 한국에서 일본으로 출장 온 기업인들 관광 가이드도 해줬어요. 일본어도 잘하고 싹싹하니깐 나중에는 MBC와 신세계 전속 업체가 통역까지 부탁해 와요. 삼성 같은 대기업에도 “동경 신주쿠에 좋은 센터가 있대” 하는 소문이 났죠.

그런데 한국 손님들은 금토일 주말만 활용해서 오고 장기 투숙을 안 해요. 그러다 보니 영업 실적이 좀 들쭉날쭉하죠. 그래서 제가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일본 사람들에게도 비즈니스호텔이 생겼다고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어요.

성공한 기업가가 한낱 유학생에게 쉽게 믿고 선뜻 일을 맡기진 않았을 텐데요
맞아요. 특히 자수성가한 재일 동포들은 일본 순사나 야쿠자한테도 당해보고, 심지어 재일 동포들한테도 당했기 때문에 사람을 쉽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광고 전단지 하나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서 전봇대 개수, 아파트 우편함 개수를 세고 다녔어요. 그 개수에 딱 맞게 광고 전단지를 준비하니 버려지는 종이가 없었죠.

전봇대, 우편함 개수까지 세어 딱 맞게 준비하니 버려지는 전단지 없어 이면지도 잘라 메모지로

보통 광고 전단지 돌릴 때 A4용지 크기의 전단지 한 장 둘둘 접어서 우편함에 툭 던져놓죠. 그런데 저는 A4용지 한 장도 반으로 잘라 썼어요. 그럼 광고전단지 2개나 나오잖아요.
지금도 저는 이면지 하나 안 버리고 잘라서 메모지로 씁니다. 그런데 그게 김희수 선생한테도 이심전심 통했던 거예요. 그 어른도 도장을 찍으면 티슈 1/4만 찢어서 인주를 닦으시는 분이거든요.(웃음)
특별히 회사 같은 곳에 홍보할 때는 전단지를 봉투에 담아서 우편함에 넣었죠. 훨씬 깔끔해 보이거든요.
결국 일본 투숙객과 한국 출장객이 모두 늘어나면서 비즈니스 센터가 성공했어요. 김희수 선생은 이런 과정을 묵묵히 관찰하신 거죠. 아르바이트생에 불과한 제게 김희수 선생이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게 느껴졌어요.

한번은 제게 전공이 뭔지, 요즘 어떤 공부를 하는지 물어 “우자와 요시요키 교수님 밑에서 이런 졸업논문 준비하고 있습니다” 답했어요. 졸업할 때쯤 되어 김희수 선생이 제게 “우자와 요시요키 교수님은 건강하신가?” 묻는 거예요. 제 말을 흘려듣지 않고 지도 교수님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셨던 거죠.
몇 년 뒤 김희수 선생이 수림학교를 만들었어요. 어느 정도 자리 잡은 비즈니스 센터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저를 수림에서 일하게 하셨어요.

그런데 출근하면 김희수 선생이 “수림학교까지 어떻게 오냐”고 항시 두 번씩 물어요. 수림학교가 나오시마에 있었는데 지하철 환승을 해서 오면 20엔이 더 싸지만 환승하지 않으면 20엔이 더 비쌌거든요.
이 어른도 진짜 돈을 써야 할 곳에는 큰돈도 거침없이 희사하지만 교통비 20엔이라도 아낄 수 있는 것은 철저히 아끼셨죠. 저놈이 평소에 돈을 어떤 자세로 쓰는가 보셨던 거죠. 그때는 몰랐는데 일종의 테스트였던 거예요.(웃음)

김희수 선생 쓰러진 후 신경호 이사장이 매일 기록한 투병일지

김희수 선생은 당시 하고 있는 사업도 많았는데 왜 수림학교를 지었나요
김희수 선생은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나 열세 살에 홀로 현해탄을 건넜어요. ‘조센징’ ‘한도징’으로 냉대받으며 살았기에 ‘배워야 산다’는 것을 뼈저리게 몸으로 익히셨죠. 그는 일본 현지에 교육 기관을 세워 교포 자녀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하고, 그들이 한일 양국에서 환영받는 인재로 성장하기를 바라셨어요.

또 한일 양국이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심리적으로 멀다는 점도 늘 안타까워했어요. 그는 두 나라가 진정한 동반자가 되려면 서로의 언어와 문화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믿었죠.

단순히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국의 정서를 이해하고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민간 외교관을 키워내는 것이 수림학교 설립의 주된 목적이었죠.

김희수 선생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 어떻게 독보적으로 김희수 선생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나요
한국과 일본을 자주 오가면서 직원들이 출장비를 받아 가면 잔돈이 꼭 남아요. 그런데 선배 A는 잔돈을 정산하지 않고 그냥 인마이포켓하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조금이라도 남으면 1엔짜리까지 정산해서 경리한테 가져다주었거든요.
김희수 선생은 절대 직원들한테 정산을 잘했는지 직접 묻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경리한테 “신 군이랑 A군 잘하고 있나?” 체크하시곤 했대요. 경리를 통해 다 보고 받으셨던 거죠.

그렇게 저를 한 10년 정도 관찰하면서 조금씩 마음을 여셨어요. 어느 순간 저에게 “점점 네가 중심이 되어 학교를 운영해야겠다” 하셨고 선배 A에게는 “A군은 점점 물러나야겠다” 그러셨죠. 영호남 갈등이 뿌리 깊은 때인데 경남 창원 출신인 김희수 선생이 전남 고흥 출신인 저를 승계자로 만들었다는 것이 참 놀라워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많은 부동산을 관리하고 사업하기만도 바빴을 텐데 직원들의 작은 씀씀이도 신경 쓴 거잖아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애정 없이는 그러기가 쉽지 않거든요. 제대로 된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잘 아시기에 교육에도 힘쓰신 것 같아요.

인터뷰 내내 김희수 선생 자랑을 더 많이 하시네요.(웃음) 무엇을 위해 그분의 뜻을 되살리는 데 전력하시는 건가요
세상에 성공한 사람은 많아요. 하지만 자신의 처지가 어려워졌을 때마저도 그나마 남아있는 재산을 모조리 사회에 내놓은 사람은 흔치 않지요. 특히 김희수 선생은 그냥 재산만 내놓은 것이 아니라 그 재산이 후학 양성에 어떻게 하면 실질적으로 잘 쓰일 수 있을까 평생을 고민하다 돌아가셨어요.

그는 80년대에 금정기업 사회문제연구소를 개설하고 실적과 경험 많은 학자 일곱 분을 모셔 와 시사, 노인, 교육 문제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셨죠. 그 연구 내용을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기관지로 발행하셨어요. 직원들에게도 개인 문제와 회사 일 외에 주변 사람들,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라고 늘 당부하셨죠.
김희수 선생은 “다음 세대에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인생의 下이며, 사업을 물려주는 것은 中이고, 사람을 남기는 것은 上으로 최고의 인생이다” 말씀하시곤 했어요.

자신을 ‘사람을 남기는 일에 헌신하다 간 사람’으로 기억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했지요.
김희수 선생 곁을 30년 동안 보필한 제가 나서지 않으면 김희수 선생의 그 열정적인 삶을 누가 다 기억하겠습니까. 자식들도 안 가져간 김희수 선생의 다이어리를 제가 다 간직하고 있습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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