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시대 우리는 문화적인가!

발행인 윤학

그림 이종상

장인어른은 가끔 할아버지를 회상하곤 했다. 국민학교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가끔 찾아오셨었다는 이야기며, 갓을 쓰고 장에 다녀오시다가 멀리 고갯길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걸 꺼내 입으로 가져가더니 소리를 내 놀랐다는 하모니카 이야기는 늘 내 가슴에 남아 있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 “할아버지와 사랑방에서 잠을 잤어. 어느 날 달이 훤히 밝은 거야. 달빛에 뒤안 대나무 그림자가 창호지에 흔들거렸어. 그러자 할아버지가 ‘일규야! 이런 걸 보고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거야’” 그 얘기를 들을 때면 나도 환한 달빛에 흔들리는 대나뭇잎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일규 소년은 훗날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시로 썼고 그 시로 ‘현대문학’ 추천 시인이 되었다. 소년에게 그런 할아버지가 안 계셨더라면 그 시가 나올 수 있었을까? 요즘 우리는 아이들에게 수학을, 영어를 잘하라고 다그친다. 그 아이들이 자라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얻고 주식으로, 부동산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 높아가는 고층 아파트와 멋진 외제 차에 눈길을 빼앗겨 창호지에 어린 대나무 그림자에는 관심 갖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달빛에 대나무 그림자 창호지에 흔들거리자 할아버지 ‘이런 걸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거야’ 소년 훗날 시인 되어

어느 날 장인에게 음악을 들려드렸다. 연주 현장처럼 자연스런 소리가 나는 스피커에서 베토벤 ‘합창’이 나오자 장인은 눈을 감고 한참 들으시더니 한마디 하셨다. “우리 회장님은 이 좋은 음악 한번 못 듣고 돌아가셨어야…” 함께 일했던 재벌 회장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돈 버느라 경영하느라 하루도 잠잠할 날 없던 삶에 음악이 들어갈 틈이 없었을 것이다. 돈도, 회사도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한 것인데 목적은 잊고 수단만 얻다가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권력의 정점에 서려는 것도 결국 본인도, 사람들도 더 아름답게 살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더 큰 권력만 가지려고 이전투구만 벌이니… 거짓까지 만들어 상대를 무릎 꿇리려 하고 상대의 약점만 보이면 물고 늘어진다. 일규 소년의 할아버지가 그런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하실까. “일규야! 저런 걸 ‘추하다’고 하는 거란다” 하지 않으실까?
김구 선생은 말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富强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인류가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자비가,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그런데 지금 백범 정신을 따른다고 소리치는 정치인일수록 정작 문화나 아름다움은 멀리하며 살고 있다. 자비와 사랑, 문화가 없는 정치인일수록 백범을 들먹인다. 문화계라고 다르지 않다. 정치가 문화계에 뭔가 해주기를 바라며 정계와 관가를 기웃거리는 거짓 문화인이 얼마나 많은가. 정치도 그런 거짓 문화와 손잡고 문화적인 정치라도 하는 양 위선으로 세상을 뒤덮어 간다.
우리 가정은 어떠한가? 가정마다 아파트 가격과 자동차 이름을 앞에 놓고 문화는 뒷전이다. 자녀에게 고가 아파트를 사줬다고 자랑하는 엄마, 동요나 좋은 음악은 들려주지 않으면서 점수만 올려 일류 대학에 들어갔다, 의사·판검사로 키웠다고 자랑하는 아빠. 이런 가정이 늘어가는 한 백범이 바라는 높은 문화의 나라, 아름다운 나라는 불가능하다.

권력을 맘껏 누렸던 전직 대통령을 보자. 박정희는 왜 총을 맞았으며 전두환은 왜 감옥에 갔던가. 독재와 폭력을 사용한 비문화적인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그들 가슴에 문화가 있었더라면… 문재인, 윤석열은 문화적인 정치를 했던가. 이재명은? 부를 맘껏 누렸지만 좋은 음악 한 번 듣지 못하고 안타깝게 떠난 재벌을 보자! 문화가 없으면 아무리 큰 권력과 부를 누려도 결국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된다. 놀라운 것은 그런 비문화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더 떠받들고 동경하는 국민들이 많고도 많으니…

새벽마다 성당에 나가 기도하시는 장인어른은 젊은 시절 내게 늘 말씀하셨다. “지위나 재산을 어깨에 짊어지고 그 무게에 짓눌려 사는 사람이 많다. 자네는 변호사라는 자격을 호주머니에 넣고 가볍게 다니면 좋겠다”고.
그런데 요즘 지위나 재산을 어깨에 걸머지고 끙끙대며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권력과 부를 아름다운 삶, 문화적인 삶보다 더 높은 가치로 떠받들기 때문에 지위나 재산에 짓눌려 살 수밖에 없다.
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 안타깝지 않은가!

아흔을 훌쩍 넘긴 장인이 지난봄 최봉자 수녀님께 성가정상을 조각해 달라고 부탁해 우리 집 마당에 설치해 주셨다. 나도, 아내도, 내 아이들은 물론 내 손자 손녀까지 두고두고 가까이 볼 수 있다면서.
돈벌이를 못 한 지 수십 년이 된 분이 큰돈이 드는 그런 선물을 주시다니! 자녀들에게 돈을 주거나 아파트를 사주는 부모는 많아도 그런 예술품을 놓아주는 경우는 보지 못한 나로서는 장인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장인의 가슴 속에는 돈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 분명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장인이 대통령이나 재벌보다 더 높고 부유해 보였다. 아름다움은 이런 것이 아닐까.

지위나 재산을 호주머니에 넣고 가볍게 다녀야 하는데 요즘 어깨에 걸머지고 끙끙대며 사는 사람들이 많아

그림책 읽어주는 엄마, 동요를 함께 부르는 아빠, 음악회에 함께 가자는 할아버지, 요리를 가르쳐주는 할머니… 이런 마음이 오고가는 가정이 높은 문화, 아름다운 가정이 아닐까. 아이가 친구에게 맞거나 놀림받아 씩씩거리며 싸우러 나가려 할 때 “참을 줄 알아야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이란다” 하며 마음을 키워주는 가족, 결혼하면 집을 사주겠다는 부모에게 정중히 사양하며 제힘으로 벌어 마련하겠다는 자녀가 있는 가정을 그려본다.
우리 가정에서부터 문화를 잃은 정치인, 아름다움을 잃은 부자를 떠받들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도 매 순간 진정 아름답고 문화적인 선택을 해나갈 것이다. 백범이 바라는 나라는 그렇게 오는 것이라고 믿는다.

발행인 윤학

spot_img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beautiful)

데스 브로피 Des Brophy 화가 가난 속에서도 어머니는 음악이 있으면 우리와 함께 항상 춤을 췄죠. 제 그림 중에 춤추는...

왕따 인생

고학찬 전 예술의 전당 사장 “딴따라과 나온 네가 어떻게 PD 시험을…”내 인생은 왕따 인생이에요. 중학교는 제주도에서 다니고 고등학교를 서울 사는...

권력버블의 정점

발행인 윤학 일본 사람들이 벼락부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자고 나면 오르는 부동산이 금세 팔리고 은행 융자로 더 비싼 땅을 사면...

요한 바오로 2세 말씀

요한 바오로 2세 내가 한 번도 안 간 나라가 많은데 한국에는왜 두 번씩이나 오게 되었는지 아시오? 내가 1984년, 한국교회 2백주년 행사...

잘난 척 하다가

다시 보는 라퐁텐 동화 아주 작은 아기 쥐가 거리에 나왔다가사람들 틈에서 왕을 모시는 코끼리 행렬을 보게 되었어요. 코끼리는 값비싼 헝겊으로 세...

관련 기사

낮은 사람을 높은 사람이라니

발행인 윤학 아내가 저녁을 아주 맛있게 차려 내왔다. 꽁치 김치찌개에 라면을 삶아 넣어 준 것이다. 라면에 꽁치통조림을 넣어 먹던 배고픈 대학 시절이 떠올라 갑자기 음악이...

두 여학생의 외침

발행인 윤학 “왜 시민들이 저런 짓을 할까?” 웅성거리는 군중 속에서 안타까운 외침이 들려왔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하얀 칼라가 선명한 교복 차림의 여고생...

대통령 놀이

발행인 윤학 손녀 현이가 친구 영아와 운동장에서 줄넘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정미가 다가와 영아에게 줄넘기를 내놓으라고 했다. 영아가 머뭇거리자 정미가 소리 지르며 영아를 밀치고 줄넘기를...

권력버블의 정점

발행인 윤학 일본 사람들이 벼락부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자고 나면 오르는 부동산이 금세 팔리고 은행 융자로 더 비싼 땅을 사면 또 오르니 너도나도 투자에 뛰어들었다....

우상의 시대

발행인 윤학 여름날 친구와 학교 뒷산에 올라 나무 그늘 아래 앉았다. 목포에서 우리 섬 중학교로 전학 온 녀석은 인기가 있었다.도시 맛이 풍겨오는 그와 단둘이서 오붓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