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의 시대

발행인 윤학

그림 김선두

여름날 친구와 학교 뒷산에 올라 나무 그늘 아래 앉았다. 목포에서 우리 섬 중학교로 전학 온 녀석은 인기가 있었다.
도시 맛이 풍겨오는 그와 단둘이서 오붓하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즐겁기만 했다. 하늘에는 구름이 흐르고 나무 사이로 바람이 살랑이며 지나가고 있었다.
한참 도시 이야기를 듣던 중 선거로 이야기를 옮겨갔다. 신민당 김대중이 공화당 김병삼 후보를 물리치던 국회의원 선거를 그는 마치 자신이 김대중이라도 된 듯 신명 나게 전해주었다. 김대중이 상대를 궁지로 몰아넣던 연설 장면이며 선거 전술을 실감 나게 들려주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선거운동원이 공화당원이라고 속이면서 집집마다 돈봉투를 돌렸다가 다시 찾아가 이웃집에 줄 봉투라며 되돌려받거나, 공화당에서 식사를 초대했다고 거짓말해 유권자가 헛걸음치게 한다거나, 상대 후보 이름으로 고무신을 몇 집에만 돌려 못 받은 유권자들을 분노케 하여 선거에서 멋지게 승리했다는 것이었다.
신문을 통해서만 듣던 김대중을 유세장마다 쫓아다닌 친구가 부럽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왜 술수를 쓰는 정치인을 우상으로 떠받드는지 내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의문이 스쳐 갔다. 상대를 거짓으로 궁지에 몰아넣어야만 이기는 것인가? 술수를 써도 사람들이 존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도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 내내 제기돼오던 ‘호남 소외론’을 들고나와 호남의 호응을 이끌어냈고 그 분위기는 지금까지 민주당 지지로 이어지고 있다.
박정희도 호남에서 영남 상품 불매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등의 허위 사실을 퍼트려 영남 표 집결에 주력했다. 결국 인구수에서 호남에 앞서는 영남을 업은 박정희가 당선되었다.

그 후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거짓 선동이 포퓰리즘으로 이어져 정치인들은 끊임없이 국민을 속여왔고 국민은 속아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국민들은 정치가 국민의 삶을 책임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면서도 정치에 기대를 걸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정치인들은 그 기대를 업고 정치를 잘하면 국민들의 삶이 풍요로워질 것 같은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다. 국민들은 정치인들의 거짓이 찬란하면 찬란할수록 표를 던지고 있다.

사기 피해는 헛된 이득 기대 안 하면 생길 수 없어 정치인의 포퓰리즘도 국민들의 헛된 기대 때문

정치인들의 선동을 막아낼 길은 없을까? 국민들이 속지 않는 길밖에 없다. 속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선동은 늘어 갈 수밖에 없다. 화려한 말 잔치를 하지 않으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터인데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될망정 그만둘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속아 넘어가는 국민이 있는 한 속이려는 정치인은 계속 세상을 어지럽힐 것이다.

더구나 국민들은 몇 년만 지나면 정치인들의 뻔한 거짓도 까맣게 잊고 또 다른 거짓에 현혹되어 열광을 해주니 거짓은 거짓을 낳을 수밖에 없다.
왜 국민들은 거짓에 속아 넘어가는가? 변호사를 하면서 나는 수많은 사기 피해자를 만날 수 있었다.
헐값에 집을 판다고 해서 샀는데 집주인처럼 행세한 가정부와 계약한 사람, 아파트를 사려고 평생 모은 돈을 높은 이자를 준다고 해서 동창에게 빌려줬다 떼인 사람, 고급 음식점에서 수시로 접대하며 환심을 산 후 막대한 이득을 낳는 제품을 만든다며 자금을 대주면 엄청난 수익을 보장해 주겠다고 해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사람… 거짓말에 거액의 피해를 본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럴 때면 거짓말하는 사람보다 거짓말에 속은 사람이 더 사기꾼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사기 피해는 스스로의 노력 없이 헛된 이득을 기대하지 않으면 절대로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헛된 이득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사기당하기는 매우 힘든 노릇이다.
국민들이 정치인의 거짓과 포퓰리즘에 속는 것도 헛된 기대 때문이다.

고리의 이자를 준다는 사람이나 생산자금이 부족한 사람은 궁박한 사람인데 그 궁박한 사람으로부터 막대한 이득을 보려는 헛된 기대가 피해를 불러오듯이 정치인들도 온갖 수를 써서 자리 하나 차지하려고 표를 구걸하는 궁박한 사람들일 뿐인데도 우리는 그들에게 헛된 이득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 헛된 기대만 접는다면 사기꾼에게도 정치인에게도 피해를 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유신을 지지하며 박정희에게도, 호남을 풍요롭게 한다는 김대중에게도, 소득주도성장으로 서민을 부유케 해준다는 문재인에게도, 공정한 세상을 만들어 준다는 윤석열에게도 표를 던져왔다. 그 결과는? 독재와 포퓰리즘과 거짓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서민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고 빈부격차는 심화되었으며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뻔뻔스런 경쟁 만능 시대를 맞게 되었다.

국민의 기대가 그 정권의 힘 기대 클수록 권력 남용 자기 한 몸 지키기도 어려운 정치인들에게 왜 기대를

우리의 헛된 기대가 클수록 사기꾼의 요구도 커지고 사기꾼의 힘도 커질 수밖에 없다. 지금 이재명 정부는 견제할 장치가 없다. 그간 입법, 사법, 행정부가 서로 견제라도 할 수 있어 그나마 균형을 잡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마저 무너졌다.
그러나 정부가 잘못된 힘을 쓰는 것은 누군가 힘을 실어주기 때문이다. 정권의 힘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의 정권에 대한 기대가 그 정권의 힘인 것이다. 그 힘을 주지 않으면, 기대하지 않으면 견제하지 않아도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게 된다.

사기꾼이 남의 돈을 자기 돈처럼 마구 쓸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은 피해자가 헛된 기대로 힘을 실어주기 때문이다. 남을 속이는 것은 사기꾼의 능력이지만 남의 돈을 제 돈처럼 마음대로 사용하게 되면 사기꾼에게는 권력이 된다. 사기꾼이 그런 막대한 힘을 갖는 것은 결국 피해자의 헛된 기대 때문이다.
거짓 선동에 넘어가지 않는 국민이, 정치인에게 헛된 기대를 걸지 않는 국민이 더 많이 생겨나기를 기대해 본다. 자기 한 몸, 자기 가정 지키기도 어려운 정치인들에게 왜 기대를 하는가.

발행인 윤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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