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은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

발행인 윤학

그림 이종상

성수동 하숙집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 주인아주머니는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며칠 전 광주에 내려간다며 하숙집을 나섰던 내가 초점 잃은 눈에 거지꼴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80년 5월, 신문이건 방송이건 광주에서 무장 폭동이 일어났다고 떠들고 있을 때였다. 폭도들이 방송국을 불태우고 경찰서를 습격한다는 뉴스가 매일 전국을 뒤덮고 있었다.

‘광주에서 일을 저지르고 왔구나’ 그녀는 신고해야 하나 망설이는 듯하다가 나를 하숙방에 밀어 넣고는 큰 이불로 뒤집어씌웠다. 아주머니가 혹시 신고하는 건 아닐까 겁이 났다. 그러면 사법고시도 못 보고 취직도 할 수 없어 부랑배처럼 살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후 아주머니가 사정했다. “나도 신고 안 했다고 잡혀가면 큰일이다. 이웃 눈도 있으니 밤에 조용히 나가 줘” 앞이 캄캄했다. “오늘 밤만 자고 새벽 일찍 나갈게요”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에 조용히 집을 나섰다.

먼저 신문사를 찾아가기로 했다. 불심검문에 걸려 잡혀갈 수도 있지만 광주의 실상을 제대로 보도해 주기만 하면 계엄군이 광주 시민들을 학살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

그녀는 신고해야 하나 망설이다 나를 큰 이불로 뒤집어씌웠다 잠시 후 ‘밤에 조용히 나가 줘’ 사정

편집실에 들어섰더니 기자들이 우왕좌왕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기자를 붙들고 대학원생이라 소개한 후 광주의 실상을 들어달라고 울먹였다. 그는 보도 통제로 그런 건 일체 쓸 수 없다며 자리를 떠났다. 다른 기자들도 마찬가지라 절망감만 커졌다.
서울에서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없는가!

고교 시절 자취방 이사하던 날 내 책과 책상을 리어카로 날라줬던 친구가 떠올랐다. 친구는 하숙집 주인에게 광주에서 왔다는 걸 숨기고 그의 방에 머무르게 해주었다. 80년 5월, 광주역에 도착하자 군인들이 삼엄하게 도열해 있었다. 나는 소문의 실상을 알고 싶어 살금살금 도청 앞까지 갔다. 군인들은 최루탄을 마구 쏘아대고 시민들은 군인들을 향해 버스로 돌진하는 아수라장이었다.

시민들도 군인들도 무얼 위해 서로 싸우는 것인가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저 시민들도 군인들도 소중한 우리 국민 아닌가!
평화적 시위를 하면 군인도 시민도 다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침 한 여자가 확성기를 지프에 싣고 서성이고 있었다. 그 확성기를 이용해 “우리의 적은 군인들이 아닙니다!” 지프에 탄 내가 맨 앞에서 구호를 외치자 버스들이 뒤따르더니 시민들도 따르기 시작했다.

전남여고와 문화방송 사이 대로에 수십 대의 차량이 모이자 나는 군인들이 장악한 도청 반대 방향으로 평화로운 시가행진을 해나갔다. 한참 목청껏 외쳤더니 목이 쉬어 소리가 안 나왔다. 그 여자에게 구호를 쪽지에 써주며 외치도록 했다. 공포에 떨고 있던 시민들도 구호를 듣고 집을 나와 뒤따랐다. 그 수많은 시민의 물결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며칠 후 시민과 대치하던 계엄군이 철수한 도청을 나오는데 웬 복면 사나이가 내게 총을 겨누며 소리쳤다. “너 간첩이지?” ‘아,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구나’ 공포감에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따르던 청년 두 명이 “야, 이 새끼 너는 뭐야?” 외치며 복면 사나이의 옆구리에 총을 들이댔다. 그가 멈칫하더니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이었다.

군인들은 쏘아대고 시민들 돌진하는 아수라장 평화 시위하면 아무도 안 다칠 텐데 그때 한 여자가…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구나! 이러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겠구나. 광주를 벗어나자!’ 나는 시민군 트럭을 향해 전력 질주해 올라탔다. 광주 외곽에서 내린 후 계엄군을 피해 산을 넘어 남으로 남으로 걸었다. 화순역에 도착해 기차에 올라탔다. 서울에 가면 광주의 실상을 알려야지 다짐했다.

며칠 후 계엄군의 총탄에 광주는 진압되었다. 그리고 재판이 시작되었다. 지고 지엄한 판사들은 시민을 ‘폭도’로 몰아 징역형은 물론 사형까지 선고했다. 언론도 대다수 국민들도 그 엉터리 판결에 침묵했다. 요즘은 어떤가? 5·18 광주 시민들을 폭도라고 하면 정신이상자 취급받는다. 80년대 반란의 도시였던 광주가 지금은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다. 그때의 ‘폭도’는 이제 ‘민주투사’로 불리고, 이들을 모독하면 처벌까지 받는 세상이 되었다. 광주가 80년에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한 사실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면 무엇이 변한 것일까?

그때도 지금도 법관들은 권력이나 여론의 눈치를 보며 판결하고 있지 않는가. 권력이나 여론이 폭도라고 하면 폭도로, 민주투사라고 하면 민주투사로! 조봉암을 사형선고로 죽인 것도 법관들이었고 조봉암을 재심에서 무죄 선고한 것도 법관들이었다. 똑같은 조봉암을 두고 똑같은 광주를 두고 판결은 바뀌었지만 법관들의 권력과 여론 추종은 변함없다. 언론이라고 다를 바 없다. 5·18 당시 폭도라고 보도했지만 지금은 어느 기자도 폭도라고 하지 않는다. 국민들도 언론의 보도대로, 세상 분위기대로 판단하고 만다.

45년이 흘러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국회의 계엄령 해제 결의가 있자마자 거의 모든 신문은 내란으로 규정했다. 내가 5·18 때 찾아갔었던 그 보수적인 신문까지도 앞장서서 비난했다. 그러다 며칠 후 대통령을 지지하는 듯한 논조로 돌아섰다. 참 염치없는 언론이다.
80년 5월 대다수 서울 시민들과 언론이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우리는 진실을 알려고 하기보다 내 편인가 네 편인가부터 판단한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옳은 판단인지 고민하는 국민이 늘어갔으면 한다. 그런 국민들이 늘어가야 언론도 법관도 진실을 밝히는 데 마음을 쏟을 것이다.

지고 지엄한 판사들 시민을 ‘폭도’로 몰아 사형까지 선고 요즘은 민주투사로! 무엇이 변한 것일까?

언론과 법관들만 탓할 게 아니라 나 한 사람만이라도 내 편, 네 편에서 벗어나 진정 옳은 것이 무엇인지 심사숙고할 때 언론도 법관들도 바로 설 것이다.
그 엄혹한 상황에서도 나를 신고하지 않은 하숙집 아주머니,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그 좁은 하숙방에 나를 며칠씩이나 받아준 친구를 떠올리면 아직도 희망은 있다. 세상이 아무리 혼탁해도 옳은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 주위에 있다.

지금 우리에게 내 편이든 네 편이든 진실을 보려는 눈을 가진 사람이 늘어가는 것, 그보다 더 큰 애국은 없을 것이다.
군인들이 무자비하게 시민들을 살상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군인들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외쳤을 때 시민들이 따라주던 그날 밤, 광주 시민들이 얼마나 애타게 평화를 바라는지 시위하는 내내 가슴이 벅찼다. 지금 우리 국민들도 네 편이라면 증오하면서도 진정 원하는 것은 평화와 사랑이 아닐까. 독자들이 글에 담긴 의미를 헤아리기보다 필자가 내 편인지 네 편인지만 판단하려고 하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발행인 윤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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