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사진 세 장만

고용석 작가

누구보다 빨리 MP3를 사용했을 만큼 내로라하는 얼리어답터. 그러나 어느 순간, 디지털 기기에 삶이 지배당하는 것을 느껴 ‘디지털 디스커넥트’ 프로젝트를 시작. 디지털과 삶의 조화를 고민하고 실험해 그 결과를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2020년. 오랜만에 제주도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공항에서 발권을 하자마자 티켓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이번에도 엄청 찍어대겠지. 근데 내가 여행 사진을 다시 본 적이 있나?’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하루에 딱 세 장만 촬영하기로 결심했다. 너무 가혹한 결정이 아닐까 싶었지만, 이렇게 극단적으로 하지 않으면 여행 내내 무의미하게 스마트폰 버튼만 누를 것 같았다.
티켓 사진부터 찍지 못하자 뇌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손이 계속 주머니 속 스마트폰으로 향했다. 뇌는 끊임없이 금단증상을 호소하고 적당히 타협하려 했고, 나는 결국 스마트폰을 주머니가 아닌 가방 깊숙한 곳에 넣었다.
터미널 중앙에 독특한 구조의 기둥이 보였다. 거대한 유리지붕을 단순하게 생긴 기둥 몇 개가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찍어놓고 미술 수업 참고자료로 써야겠다’ 생각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스마트폰은 이미 가방에 봉인해 두었기에 텅 빈 주머니만 뒤적거릴 뿐이었다.

티켓 사진 찍으려다 이번 여행에서는 하루에 딱 세 장만 촬영하기로 결심해

비행기에서 기록한 노트 필기

수업 참고자료로 써야겠다’ 생각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스마트폰은 이미 가방에 봉인해 두었기에 텅 빈 주머니만 뒤적거릴 뿐이었다.
뇌는 계속해서 지금 찍어두지 않으면 다 잊어버릴 거라고 협박했다. 그동안 나는 명함도, 메모도 바로바로 찍어놓곤 했다. 나중에 안 볼 걸 알면서도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그걸 찍었다는 것조차 잊는다는 점이다. 결국 수많은 사진에 묻혀 내 기억도 사라졌다.

뇌는 지금 찍어두지 않으면 다 잊을 거라 협박했지만 뇌의 협박에 반격을

그렇다면 이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라스코 동굴 벽화를 그린 원시인이 되기로 했다. 먼 옛날 원시인들은 어두운 동굴 속에서 횃불을 켜놓고 숯과 흙으로 자신이 간직하고 싶은 걸 그렸다. 어쩌면 소중한 기억과 경험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남겨 영원히 간직하고픈 욕망은 이때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 지금에 와서는 스마트폰 카메라가 그 자리를 넘보고 있을 뿐.
뇌의 협박에 대해 나는 반격을 가했다.

고용석 작가

spot_img

학교폭력! 도저히 못 참겠다

흰물결이 만난 사람김종기 푸른나무재단 명예이사장 아드님이 학교폭력으로 힘들어하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나요한번은 아들 얼굴에 멍이 들고 안경까지 망가졌어요. 깡패한테 맞았다고...

新聞이냐 舊聞이냐

발행인 윤 학 그림 이종상 어릴 적부터 신문을 보아왔다. 그런데 10년, 20년, 30년 신문을 보면 볼수록 신문新聞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 가족의 용서

첫 휴가도 나가기 전에 부대 내에서 불의의 사고로 20년 12일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 간 알렉산델의 아버지를 만났다. 알렉산델은 과속으로...

채빈이의 분노

이준원 교사마음지원센터 소장 채빈이는 책상과 의자를 집어던지며 교실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나는 교실 뒤쪽에 앉아 씩씩거리다가 통곡을 하는...

요즘 세상에 신문을!

오랜만에 만난 후배가 찾아와 “아니 세상에, 신문을 발행하다니! 요즘 누가 신문을 읽어?”하고 걱정했다. 언론계에 있었던 후배는 내...

관련 기사

아이들 웃음은 강력한 전단지

고용석 작가 아이들이 “저도 이거 만들고 싶어요” 열광한다. 선생님들도 “제가 해도 재밌어요” 감탄한다. 내가 만든 구슬트랙 때문이다. 구슬트랙은 구슬을 굴려 내려보내는 놀이다. 미술 학원 부원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