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선생과의 첫 만남

나의 예술 이야기

정명지 교사

나는 이청준 선생님을 직접 뵌 적이 없다. 그러나 20대 이후, 그분은 내 삶의 길잡이였다. 어머니가 내 몸에 밥을 주셨다면 그분은 내 정신에 밥을 주신 분이다.
젊은 날은 왜 그리 안갯속같이 막막하고 원인 모를 불안과 절망이 날 휘감았을까. 그때 읽은 그분의 글은 정직한 언어의 예리한 칼날로 상처를 내서 나에게 길을 열어주고 삶의 고비 고비마다 내게 양분을 대주셨다. 때로는 이불로 덮어주듯, 때로는 밤길에 등불을 비추어주듯.

그런 은혜를 입고 산 나는 나이 60이 다 되어 지인을 통해 그분의 거처를 알게 되었다. 너무도 기뻤지만, 그분은 이미 암 말기 선고를 받고 외부와 교류를 거의 끊으신 상태였다. 나는 편지로 스무 살 적부터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마음을 전했다.

얼마 후 그분은 마지막 저서 <그곳을 잊어야 했다>를 출간하시고 얼굴도 모르는 독자에게 책을 한 권 친히 보내주셨다. ‘참 귀한 인연입니다’라는 글귀와 함께. 그리고 후일 지인에게서 그분이 내 편지를 읽으며 많이 우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수십 년 전의 이야기에 그분으로서는 여러 가지 마음이 교차하셨으리라. 더구나 시한의 삶을 사시는 때였으니. 이렇게 뵌 듯 못 뵈온 채 그분은 세상을 떠나셨다.

참 뵙고 싶었는데… 그분이 가시는 날, 나는 그분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뵈러 영결식과 노제 길에 동행했다. 영결식장에서야 비로소 나는 그분이 어떤 분이셨고, 어떤 삶을 사셨는지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젊은 날, 안갯속같이 막막하고 원인 모를 절망이 날 휘감았을 때
이청준 선생은 정직한 언어로 내게 양분을

그것은 화려한 약력이나 수상 경력에서가 아니라, 그분에게 조사弔辭를 올리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친구, 후배 문인들은 조사를 하다가 울먹임으로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피도 섞이지 않은 그들이 그렇게 아파하는 것을 보며, 그분의 삶과 인격이 얼마나 따뜻하고 진실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다정하고’ ‘진실하고’ ‘바르고’ 그들의 조사에서마다 반복되는 그 말들, 말을 잇지 못하도록 안타깝게 하는 그분의 죽음. 영결식은 그 사람 삶의 결정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산과 들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 그저 독자의 한 사람일 뿐 한 번도 뵌 적도 없는데 나는 슬픔에 잠겼다.
하지만 선생님의 고향에 가까워져 오자 내 마음속에서 슬픔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선생님은 이제야 편히 고향에서 사시게 됐구나. 고단한 삶의 짐을 내려놓고, 할 일을 다 하고 고향에 오시는구나’ 내 마음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향은 그런 것이리라. ‘어서 와라’ ‘ 애썼다’ 품어주는 어머니 품처럼.
장흥. 선생님의 고향은 참으로 깊고 아름다웠다. ‘이곳에 오시니 참 좋으시겠다’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깡촌이군, 개천에서 용 났군”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이곳이야말로 용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깊고 아름다운 자연이 그분의 소설을 이루었구나. 그 소설들이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깨우치고 구원하였으니 여기야말로 용천이 아닌가.
노제 길, 마을에선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그야말로 잔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느티나무 아래 모여선 마을 사람들은 돌아온 고향 어른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선생님의 죽음을 슬퍼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생을 기쁘게 보내드리는 잔치를 차린 것입니다”
사회자는 간곡하면서도 그러나 죽음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뛰어넘은 훌훌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나무 저 나무 아래 여기저기 둘러서서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고향 사람들.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던 노래 한가락 드릴랍니다” “선생님 보시라고 춤 한 자락 추어드린답니다” 판소리 한마당, 춤 한 자락, 그리고 선생님을 추모하는 간절한 조사… 그것은 하나의 축제였다.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장례식을 본 적이 없다. 열심히 본분을 다해 살다가 갈 때는 훌훌 이렇게 떠나고, 선선히 그러나 정성을 다해 떠나보내는 이 광경은 그분이 남긴 그 어느 소설보다 큰 감동이었다. 아니 이것이야말로 그분 소설의 완결편이 아닐까…

안영일 – 산타모니카 바다 120x77cm 유화 소위 단색화 그림이 널리 알려지기 2,30년 전 안영일 화백이 미국 LA에서 그린 그림

하관식을 마치고 아쉬움에 여기저기 선생님의 고향을 둘러보고 산을 내려가는데 저 멀리 내가 타고 왔던 버스가 떠나는 것이 아닌가. 문상객이 주로 문인들이었으니 문인이 아닌 나를 고향에 남는 가족으로 알고 챙기지 않고 떠났으리라.

뛰어가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큰일이었다. 왜냐하면…

정명지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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