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수가 죽기만 바라며

이수일 신부

신앙생활로 꽤 인정받는데 부부 갈등으로 지옥을 사는 이들 심심찮게 봐

일전에 이웃 성당 신부의 부모님 금혼식에서 혼인 갱신식을 주례한 적이 있다. 두 분 모두 건강하고 곱게 늙으셔서 결혼 50주년이 더욱더 빛나 보였다.
그런데 사목하면서 보면 신앙생활과 봉사활동도 적극적이고 남들에게도 꽤 인정받는데, 부부간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갈등으로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부부들이 심심찮게 있다. 성당에서 살다시피 봉사하면 뭐 하나. 배우자는 가슴이 썩어가고 애들은 부모 사랑에 목말라 삐뚤어져 가고 있는데…

손목시계를 분해해 보면 크고 작은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간다. 이 톱니바퀴가 따로 돌면 아무리 비싼 시계라도 시간을 정확히 알려줄 수 없으니 폐품이 된다.
부부도 세월이 갈수록 점점 멀어져 헛바퀴 도는 톱니처럼 폐품이 되어가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배우자가 날이 갈수록 더 아름답고 빛나 보여 더욱더 소중해지는 골동품같이 되어가는 부부도 있다.

교우 면담을 해보면 이미 폐품이 되어버린 지 오래된 부부들이 꽤 있다. 어째서 그 폐품을 못 갖다버리고 지옥 같은 삶을 살아왔냐고 물어보면, 할 수 없어서 그저 그 웬수가 죽기만 바라며 산다는 것이다. 그런 대답을 천연덕스럽게 하고 있는 자신도 이미 폐품이 됐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돈을 잘 벌기 때문에, 부지런하기 때문에, 잘 생겼기 때문에 사랑한다? 이것은 이기심을 위장한 천박한 사랑이다. 우리는 ‘…때문에’ 하는 사랑이 아니라 ‘…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랑을 해야 한다. 나를 힘들게 함에도 불구하고,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배우자를 사랑하겠다고 주님께 서약한 것이다.

‘…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기에 주님의 도우심을 매일매일 간절히 청해야 할 수 있는 사랑이다. 이 사랑이 결핍되면 배우자의 쓴 것을 조금도 삼킬 수가 없는 것이다.
쓴 것은 철저히 뱉고 단것만 삼키면서 살다 보면 머리도 가슴도 다 썩어가게 된다. 가정도 썩고 생활도 썩어가게 된다.

꽤 잘 산다는 집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다. 가장이 배우자와 자녀들을 가축처럼 거느리고 사는 느낌이어서 잘 갖춘 온갖 것들이 돼지우리나 외양간으로 보여 나 스스로 당황한 적이 있다.
단란한 가정이 되려면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배우자와 자녀들의 쓴 것도 삼킬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주님의 가르침과 ‘1+1=1’이라는 혼배성사의 신비를 세상 모든 부부가 깊이 깨우쳐 ‘…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드린다.

이수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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