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남편 잘 먹이고 싶어요”

흰물결이 만난 사람
장선용 요리연구가

장선용이 떴다 하면 모여드는 식구들 추수감사절 가족들과 함께

EBS ‘최고의 요리 비결’에서도, ‘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에서도 간 딱 맞는 레시피로 화제를 모았어요. 요리를 어떻게 가르치시게 된 거예요?
남편이 각 나라로 전근을 많이 다녔어요. 인도네시아에서 한 3년 살고, 필리핀 세부에서 3년 살았었거든요.
지금 세부라고 하면 한국 사람들이 많지만 그때는 딱 저희만 한국 사람이었죠. 그래서 제가 세부에 있는 유지들을 우리 집에 초대해서 한국음식을 대접하곤 했는데 시장 부인이니 뭐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 집 오면 음식이 기가 막히다며 소문이 났어요.

그분들이 그렇게 사람들을 점점 끌고 오더니 나중에는 한국 음식을 배우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돈 한 푼 안 받고 열심히 한국 음식을 가르치게 된 거예요. 거기에서 내가 쌀을 사다가 떡도 다 하고. 지금 생각하면 국위선양 한 거죠.(웃음)
이렇게 수없이 가르치다가 제대로 요리 교실을 하게 된 것은 며느리 덕분이에요. 며느리 친구들이 제 며느리한테 어머니한테 빽 좀 써서 요리 배우면 안 되겠냐고 제안을 한 거죠.

사실 저는 이 친구들 제안을 받아들인 게 요리를 가르칠 목적보다 젊은 친구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듣고 싶어서였어요. 음식하면서 자기들끼리 얘기하잖아요. 친구들한테 터놓는 이야기를 제가 알아야 우리 며느리한테 조금 더 잘할 수 있고 관계가 더 좋아지니까. 제가 하나도 안 빼고 다 듣죠.
“우리 시어머니 어쩌고저쩌고” 그러면 “저런 잔소리는 절대 하면 안 되겠구나” 깨닫는 거죠. 요리해다 시어머니 갖다드려도 고맙다 소리는커녕 맛이 있니 없니 한다는 거예요. 그런 불평들을 내가 다 듣고 머릿속에 입력해요.(웃음) 그 시간이 제게 아주 소중했어요.

요리를 가르치다 보면 품성까지 보이나요?
두 명이 한 조로 해서 음식을 만드는데 똑같이 해도 맛이 달라요. 요리가 끝나면 각자 요리한 것을 한데 모아놓고 제가 섞어요. 그리고 나서 학생들한테 집에 가져갈 거 각자 싸가라고 하죠.
며느리 친구들 팀원 중에 아이가 곧 하교해서 온다는 집 있잖아요. 그러면 자기네 거는 조금 덜 싸더라도 그 친구 걸 더 싸주고. 서로 “네가 더 가져가라” “얘, 오늘은 너희 집 손님 오신다며. 그럼 이거 네가 더 가져가” 그렇게 배려를 하니까 얼마나 보기가 좋아요.

세부 유지들 초대해 대접 우리 집 음식 기가 막히다며 사람들 끌고 오더니 ‘한국 음식 배우고 싶다’

전에 제가 맡았던 팀은 그냥 한 숟가락이라도 더 가져가려고 난리를 쳐요. ‘음식이라는 게 같이 나눠 먹는 것이 제일 중요한 건데 이렇게는 안 되겠다’ 그래서 그 팀한테는 못 가르친다고 하고 그만둬 버렸어요. 음식할 때 보면 인성이 어떤가를 알 수밖에 없어요.

처음 어떻게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셨어요?
제 고향은 평안북도 신의주지만 저희 부모님이 워낙 교육열이 강해서 6‧25가 나기도 전에 서울로 내려와 살았어요.
1915년에 내려와서 서울에 집을 크게 지었더니 신의주 일가친척은 다 우리 집에 와서 공부하는 거예요. 저희 당숙이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장기려 박사였는데 그분도 피난 내려왔을 때 저희 집에 계속 계셨어요. 그러니 늘 저희 집은 방마다 사람이 꽉꽉 차 있었어요.

밥 먹을 때도 매번 식구 한 스무 명이 같이 먹었지 한두 명만 먹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어요.(웃음) 그렇게 어머니가 워낙에 큰 살림을 하니까 요리도 잘하실 수밖에요.
이북 사람들이 먹는 데 참 열심이에요. 어머니는 교육열이 남달랐는데도 메주 뜨고 장 담그는 날, 김장 날은 학교에 보내질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공부도 중요하지만 살림 아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었거든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자식들한테 집안일을 많이 시키셨죠.

집에서 고추장 담그는 날이면 삶은 찹쌀을 커다란 대야 두 개에 담아 막대기로 저어야 하는데 그게 제 담당이었죠. 엄마가 “너희들 이런 것도 안 해보고 시집가면 힘들다. 이렇게 친정에서 일하고 가면 시집가서 하나도 안 힘들어. 다 연습하고 가야 돼” 그러셨죠. 무지 일 하다가 시집갔는데 세상 편하더라고요.(웃음)
그러다 결혼할 때 어머니가 딱 한 마디 당부하셨어요. “밖에서 일하는 남편, 세끼 밥은 꼭 따뜻하게 먹여라”

그때는 인터넷도 없고 요리책도 없던 시절이라 시집간 언니한테 물어가며 이것저것 만들기 시작했어요. 맛있지도 않았을 텐데 남편이 “맛있다 맛있다” 해주니 신이 나서 끼니마다 고슬고슬 밥 짓고 새 반찬을 만들었어요.
그렇다고 제가 결혼하자마자 요리를 잘했던 것은 아니에요. 반찬은 거의 어머니와 언니들이 도맡아 해와서 저는 밥만 하고 살림 거들 줄만 알았지 요리에는 젬병이었거든요.

나이 들면 남편이 귀찮고 사는 게 쓸쓸해진다고들 하는데 여전히 새색시처럼 에너지가 넘치세요?
‘맛있는 거 척척 해주는 엄마’를 곁에 두고 살아서 아쉬울 게 없다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나이 들면서 부쩍 어릴 적 먹던 음식을 찾는 남편이 안쓰러울 때가 있어요. 남편이나 저나 둘 다 이북 출신이지만 가족과 내려온 저와는 달리 남편은 10대 때 입던 옷 그대로 혼자 피난 온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생전 안 찾던 음식을 찾아도 귀찮다 생각하지 않고 자료도 찾아보고 공부해서 옛 맛을 최대한 살려보려고 노력해요.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얼마나 짠한지 몰라요. 음식을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일찍 떠나온 부모님 품이 그리워서인 것 같아서요.
남편은 같은 말을 해도 늘 참 예쁘게 말해요. 한번은 제가 다음날 손님 초대가 있어서 저녁을 밖에서 해결하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남편 하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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