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리어바흐에서 보내 온 편지

조후종 식품영양학과 교수

우리 집 앨범에는 흑백 가족사진이 한 장 들어 있다. 스튜디오에 가서 작품처럼 번듯하게 찍은 그런 사진이 아니다. 포즈랄 것도 없이 무덤덤하게 일렬로 서서 찍은 것이다.

남편 이남규가 유리화스테인드글라스 공부를 하겠다고 오스트리아 슐리어바흐로 떠나던 날, 공항에 배웅 나갔던 가족들과 함께 찍었다. 외국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60년대 말이었다. 식구 중 누군가가 외국으로 나간다 하면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아 두어야 한다는 듯이 시골에 있는 친지까지도 올라와 공항에서 이별식을 치르곤 했었다.

당시 이남규는 공주교육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고 있었고, 나는 대전여자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혼인 후 서서히 안정을 가지게 된 무렵이었으나, 우리는 첫 아이와 둘째 아이를 연이어 잃은 충격에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 “나의 아녜스!”로 시작되는 남
편의 편지글들은 이제 막 서로를
알아 가는 시기의 연애편지 같아

더구나 자신의 예술, 가치관에 대한 회의까지 겹쳐 남편은 방황하고 술도 많이 마셨다. 그것은 정체성 확립에 대한 갈구로 이어졌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싶어 했다. 유학이 그런 계기를 마련해주리라는 기대감을 안고 그는 무조건 떠났다.

어쨌든 그는 다시 학생 신분이 되어 버린지라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보내 줘야 했다. 그림 재료를 사야 했고 숙식을 해결해야 했으니까. 어린 윤주와 갓 태어난 동건, 새로운 학교의 직장 생활… 나는 매일매일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숨 돌릴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남편은 나의 소식이 없으면 안절부절못했다. 가정의 책임을 임시나마 내게 떠맡겨 놨다는 미안함에 늘 마음이 편치 않은 듯했다. 그는 매일 일기를 쓰듯 “나의 아녜스!”로 시작되는 편지를 내게 보냈다.

남편의 편지글들은 흡사 이제 막 만나 서로를 알아 가는 시기의 연애편지 같아 아직도 웃음이 감돈다. 혼자 남겨 둔 서울의 아내가 퍽이나 안쓰러웠던지 편지글은 더욱 다정다감했다. 그때 보내온 편지들이 이제는 빛바랜 추억이 됐지만 아직도 다정히 내게 속삭이고 있는 듯하다.

“당신의 편지는 신앙보다 더 큰 힘을 주니 당신이 참으로 위대해. 이제부터 근사한 연애가 당신과 시작되는 모양인가 봐. 애기가 당신 배 속에 있으니 그것이 난 줄 알고 태동하면 내가 껴안아 주는 줄 알아요. 모두 다 일이 잘될 터이니 모든 것은 주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소. 새벽 미사 자주 가고, 미사 중에 당신과 내가 만나요”1968.11. 28.

“오늘 편지를 보냈는데 지금 편지를 또 쓰오. 마음이 너무 허전해서… 그림을 그리면 좀 마음이 가라앉을 거야. 어떨 때는 큰 희망에 벅차다가, 어떨 때는 외롭고 실의에 차고 그래요. 더 많은 화가와 나의 후원자를 발견하면 더 용기가 나겠는데 더 기다려야 하겠지. 나는 여기 와서 좋은 것을 배웠는데, 항상 일하는 거야. 일하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지” 1968.12. 25.

“28일 시험을 치는데, 잘못하면 낙제를 한다 하오. 그래서 요즘 매일 받아쓰기를 하느라고 늙마당에 공부하는데 별수 없지. 음식을 늘 집에서 해 먹는데, 하루에 삼백 원 정도면 충분히 해 먹어요. 음식점에서는 한 끼가 제일 싼 것이 사백 원이니 많이 절약이 되는 셈이오.

어제는 여기에서 바우하우스 미전에 갔었는데, 몇 년에 한 번 있을 정도의 좋은 전람회라서 과거의 한 업적을 잘 볼 수 있었소. 그림들을 앞에 대할 때, 나는 어림없다는 생각은 전혀 없고 늘 자신만만하니 내가 걸어야 할 길이 무엇인지 확실하오”1969. 5. 26.

그러나 나는 일일이 답장을 할 수가 없었다. 여유 있게 앉아서 편지를 쓰기는 고사하고, 간단한 소식도 마음먹고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답장이 늦으면 이남규는 친구들한테 편지해서 마누라 도망갔나 가보라고 해서 나를 난감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는 이런 나의 서울 사정을 알면서도 그리움으로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신부나 교포 화가들을 만나는 날이면 더욱 외로워진다고 했다. 전화를 쉽게 걸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더욱 그림에 매달렸다. 그림 작업만이 유일한 구원인 것처럼…

그래서 그는 생전 여러 글에서 ‘예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히곤 했다. “예술가의 최종 목적은 신이 부여한 자신의 내면적 생명을 드러내는 일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신을 찬미하고 최후의 목적인 신과의 일치를 이루려는 데 있다. 이렇게 인간이 예술을 통하여 신과 일치하여 영원에 도달하고 구원된다. 이것이 유한한 인간이 영원히 사는 길이다”

예술가의 최종 목적은 신이 준 생명
드러내며 신과 일치 이루는 것 이것만이
유한한 인간 영원히 사는 길

아무도 없는 성당에 들어가 조용히 묵상을 하고 있으면 남편의 유리화를 통해 들어오는 영롱한 빛이 신의 세계로 나를 인도하는 느낌이 든다. 남편이 말했던 ‘신과의 일치’가 이런 것일까.

미술평론가 유준상 선생은 “이남규는마네시에처럼 본인의 신앙을 색채와 리듬의 추상화로 표현한 종교화가”라고 말했다. 나는 남편이 추상화가 이전에 신앙이 깊은 종교화가로 세상에 알려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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