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영훈 도시계획가, 건축가
‘건축 분야 세계 최고’라는 MIT 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한 과목 제외하고 전부 A가 나온 성적표로 MIT에 원서를 냈지만 떨어졌다. 나는 일단 전액 장학금을 제안한 ‘흑인들의 하버드’라고 불리는 하워드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생활을 좀 더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다. ‘내가 이곳 학생들에게 한국적인 것을 전할 게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태권도를 선보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어릴 때부터 배운 태권도는 무일푼인 내가 이국에서 내세울 만한 가장 큰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MIT 학생 교수 가르쳐 태권도 앞차기 모습은 캠퍼스 명물 쌍용 김석원 회장은 걸레질까지
우선 친구들을 모아 놓고 태권도를 가르쳤다. 공강 시간이나 방과 후 대여섯 명을 대상으로 시작한 것이 입소문을 탔고 곧 수십 명이 태권도 제자가 되었다. 동양 전통 무술의 매력에 빠진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중에는 나이가 꽤 든 교수도 있었다. 그들은 각자 몇 달러씩이라도 모아서 성의를 보이려고 했지만 거절했다. 한국의 전통 무예를 접하는 그들의 진지한 태도를 돈으로 희석시키고 싶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녀 학생들이 줄지어 태권도 품새를 익히고 앞차기 하는 모습은 캠퍼스의 명물이 되었다. 나의 구령에 맞춰 태권도 용어로 기합을 넣는 그들을 보며 마치 내가 민간 외교관이라도 된 듯 뿌듯했고, 도복에 새겨진 태극기가 자랑스러웠다.
제자들은 나를 ‘징기스 곽’이라고 불렀다. 동양의 정복자 징기스칸과 내 성을 따서 만든 별명이었다. 마침 그때가 미국에서 이소룡이 부르스 리로 유명할 때라 덩당아 내 인기도 치솟았다. 미국 여학생들이 막 결혼하자고 할 정도였으니까.

1967년 MIT 문을 다시 두드렸는데 입학허가가 났다. MIT는 다른 대학과 달랐다. 책에서나 봤던 유명 교수는 넥타이도 매지 않았고 엄격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자유로운 토론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 도서관은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문 닫은 적이 없을 정도로 밤낮 구분이 없었다. 학생들은 도서관 바닥에서 잠을 자며 공부를 하곤 했다. 학점을 주는 방식도 특이했다. 학기를 마칠 때면 학생이 자신의 학점을 스스로 정해 제출하고 교수는 그 평가가 타당한지만 판단했다.
나는 MIT에 와서도 태권도를 무료로 가르쳤지만, 대학생 외에 일반 수련생까지 하나둘 늘어나자 은근히 욕심이 생겨 센트럴스퀘어에 공간을 빌려 어설프게나마 작은 도장을 열었다.
“석원아 한국에 스키장 만드는 거 생각해봐 언젠가 동계올림픽 할 줄 알아?” 그렇게 용평리조트 시작
그 즈음 1968년 그르노블 동계올림픽에 자극을 받아 대관령 일대에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겠다는 꿈도 갖게 되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동계올림픽을 개최한다는 발상 자체가 터무니 없는 몽상이었다. 빙상, 설상 종목은 장비가 비싸고 전용 경기장이 필요하니 ‘돈 많이 드는 운동’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스키장 하나 없었으니… 하지만 그런 만큼 더 오랫동안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내 곁에는 나 같은 몽상가가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유학 시절 친하게 지냈던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이었다. 그는 내가 태권도장을 차리자…
곽영훈 도시계획가, 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