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방송》 단박에 시청자 사로잡아

김재연 前 KBS PD 국장
<도전하고 질문하고 의심하라> 저자

방송에 입문한 지 15년째 되던 해였다. 당시 나는 새로운 기획을 찾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회사는 물론 후배들까지 내 차기 연출작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터라 뭔가 획기적인 걸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어느 날 본부장이 “외국에서 체험 프로그램이 유행하는데, 우리도 한번 해보지?”라고 제안하였다. 그때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듯 ‘팍’하고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연극에 빠져 있을 때 내게 영감을 주었던 폴란드 연출가 예르지 그로토프스키의 ‘가난한 연극론’이었다.

그로토프스키는 연극의 이념을 근원을 찾아가는 데 두며, 신의 대리인으로 성스러운 배우 holy actor를 내세워 삶의 원형과 만나는 가난한 연극론을 구현해 낸다.
나는 ‘가난한 방송’이라는 개념으로 색다른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정치인, 유명 배우, 스포츠 스타가 노동자 된다면? “유명인들 뭣 하러 막노동꾼 돼 생고생 하겠냐?”

그가 말하는 삶의 원형을 나는 노동에서 찾았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며, 노동으로 단련된 근육은 펄떡이는 삶의 심장이 아니던가.
노동 현장에서 멀어진 정치인이나 유명 배우, 스포츠 스타 등이 노동자가 된다면 이는 노동의 신성함과 숭고함을 되새김해 주는 장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루 노동 체험을 시간 순서대로 담기로 했다. 사전 답사는 물론, 구성안이나 대본, 심지어 연출조차 필요 없는 방송. 오로지 카메라의 눈으로 관찰하고 지켜보고 기록하는 것. 뭔가 획기적인 프로그램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기획안이 마련되자 곧장 진행자 선정에 들어갔다. 무엇보다 출연자와 시청자, 현장과 시청자를 연결하는 중개자가 필요했다. 그때 프로그램의 중심을 잡고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적임자로 떠오른 사람이 바로 가수 조영남 씨였다.

조영남 씨를 섭외하기 위해 직접 집으로 찾아갔다. 그와는 이미 안면이 있어 격의 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유명 인사가 막노동꾼이 되어 노동을 하는 거야. 당연히 엄청 힘들고 실수 연발일 거고. 같이 일하는 노동자들이 웃고 한심해하다가 마구 닦달도 하는 거지. 그러면서 출연자는 차츰 노동에 적응해 가고,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그 땀의 의미, 고단한 노동의 의미… 이런 것들을 말해 보고 싶은 거지”

기획 의도를 설명하고 진행을 부탁했지만 그가 보인 반응은 내 바람과는 너무나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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