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실에 전교생 사진 붙여놓고

이준원 前 덕양중 교장

교장으로 부임한 첫 학교를 하필 폐교 위기의 학교로 선택하셨다면서요?

덕양중학교에 부임하던 첫 출근길이 아직도 생생해요. 학교로 가는 도로는 아스팔트가 깨어져 있거나 움푹 파인 채 방치된 흔적이 역력했죠. 학교는 학생 수가 많이 줄어 이미 여러 번 폐교 권고를 받은 상태였어요. 주변은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는 데다 학교 옆 군부대가 있어 주민들은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찾아 대도시로 떠난 거였죠.
돈 있는 사람들은 이곳이 서울과 가까우니까 언젠가는 개발될 거라며 땅을 사놨어요. 투자다 보니 자기 땅에 집이 무너져도 모를 정도로 관심 없는 거죠. 투자자는 개발 차익만 챙기면 되니까요. 그러다 보니 굉장히 어려운 사람들만 살았던 거죠. 월세 3만 원 내고 다섯 집이 공용 화장실 하나를 같이 썼어요. 얼마나 개발이 안 된 곳이냐면 학교 교문 옆에 일제강점기 때, 6‧25 때 지어졌던 집이 그대로 있었죠.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에게 버려지거나 방치된 상태였어요. 심지어 알코올 중독 아버지는 아이가 술 심부름 약 심부름 해야 해서 학교 안 보내겠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 2009년 폐교 위기의 학교들을 되살려 새로운 공교육 모델을 만들고자 하는 ‘작은 학교 살리기 운동’이 시작되었어요. 학교에 자율권을 주고 교사, 학생, 학부모가 학교의 운영 주체가 되어 변화를 이끌어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덕양중도 그 모델로 뽑혀 교장을 공모했던 거예요.
마침 저와 함께 파견교사로 공부하던 선생님이 교장을 공모하는데 저한테 딱 맞을 거 같다고 귀띔을 해줘서 덕양중을 알게 되었어요.
37년간 교사를 하다 보니 학생들만 아픈 게 아니고, 부모들도 교사들까지도 마음이 아프다는 걸 알게 됐고 그게 늘 안타까웠거든요. 그래서 학부모와 학생, 교사의 내면을 치유할 수 있는 학교, 정말 행복한 문화가 있는 학교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꿈을 품고 있었는데 잘됐구나 싶었죠. 오히려 폐교 위기라는 사실, 문제아들만 남아있다는 사실이 의욕을 북돋아 줬어요.

공교육의 모범 사례로 꼽히는 학교로 변모해 이제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벤치마킹하려고 덕양중을 찾아온다고 들었어요

사고 쳐서 고등학교도 못 갈 줄 알았던 아이들이 덕양중 다니면서 사람 돼서 대학까지 갔다고 동네에 소문이 나는 거예요. 이제는 학생들이 다른 학교로 나가기는커녕, 친구네 집으로 주소 옮겨놓고 덕양중으로 위장전입 하는 해프닝도 있어요.(웃음) 실제로 학생 70%가 덕양중으로 진학하기 위해 이사 온 아이들로 채워졌으니 기적이죠.
이렇게 되기까지는 제가 교장으로 가기 전 세 선생님의 역할이 컸던 것 같아요. 개교 이래 교장도 교사들도 한 2년만 지나면 다들 못 견디고 도망갔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그 세 분이 우리마저 도망가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대요. 날마다 모여서 눈물로 기도하면서 어떻게 아이들이 학교를 오게 할 것인가, 어떻게 수업을 하나 연구한 거죠. 점점 아이들의 삶과 연결된 수업을 하게 됐는데 반응이 좋았대요. 그렇게 고군분투하던 차에 제가 오게 된 거예요.
제가 부임하던 해 인근 초등학교 6학년생이 12명이었어요. 4명은 다른 중학교로 간다고 했기에 실질적인 덕양중 입학 인원은 8명이었죠. 당장 중3 학생들이 졸업하면 전교생이 100명 이하로 떨어질 게 뻔하잖아요. 그래서 학군 밖 초등학교 6학년 학부모들을 만나 저의 비전을 설명하면서 설득했어요. 발품 판 덕분에 그해 40명 정도 입학시킬 수 있었어요.
첫 입학식 때 학부모들과 대화 시간을 갖고 싶다고 제안했더니 선생님들이 한 명도 안 온다면서 반대하는 거예요. 학부모 총회 때도, 심지어 입학식에도 잘 안 나온대요.

37년간 교사 하다보니 학생들만 마음 아픈 게 아니고 부모들도 교사들까지도 마음 아프다는 걸 알게 돼

그래서 신입생 학부모들한테 제가 직접 전화를 걸었어요. 새로운 교장이라고 소개하니 깜짝 놀라죠. 먹고 살기 바빠서 못 간다는 사람도 있고 귀찮아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열 명이나 오셔서 한 분 한 분 자녀를 왜 이 학교에 보냈는지, 어떤 교육을 원하는지 들을 수 있었어요. 부모들이 교장선생님하고는 처음 얘기해 본다고 하더라고요.(웃음)
다음 학부모 총회부터는 자녀 교육에 대해 같이 공부해 보자고 했어요. 점점 학교에 신뢰를 가지더라고요. 그때 전교생이 120명 정도였는데 한 명도 안 오던 학부모총회에 무려 40명의 부모가 참석했어요. 그렇게 매주 목요일 저녁마다 학부모들과의 만남이 시작됐죠.

학생들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갔나요?

아침 등교 맞이를 시작했어요. 한두 번 볼까 말까 하는 교장선생님이 아침 일찍부터 교문에 나와 자신들을 귀한 손님 대하듯 맞이해준다고 생각해보세요. 중학생이 사춘기다, 중2병이다 하지만 마음은 다 느끼거든요. 저는 아이들이 교문에 들어서면서 하교할 때까지 학교에서의 모든 삶 속에서 ‘내가 진짜 사랑받고 있구나’를 느낄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교문에 나가기 전 아이들 사진과 이름을 보며 몇 번이고 외워요. 제 교장실 책상 뒤에 전교생 사진과 이름을 붙여 놨거든요. 그러면 여자친구하고 헤어져서 힘들다, 부모가 이혼 위기에 있어서 괴롭다… 아이들이 털어놓은 얘기들을 다시 곱씹을 수 있어요.
한번은 영하 10도 겨울 날씨에 교문에서 맞이해주고 있었어요. 그런데 몇몇 애들이 겉옷도 없이 얇은 체육복에 슬리퍼 찍찍 끌고 바들바들 떨면서 들어와요. 이런 아이들은 보통 할머니가 키워주시는데 할머니들은 옛날 스타일로 시장에 있는 거 사다 주시는 거예요. 그럼 아이는 “창피해서 어떻게 입고 가냐” 그러는 거죠.

부모가 다툴 때마다 “네 새끼니, 니 새끼니” 듣던 아이들에게 핫팩 쥐어주면 눈빛 선해져 눈물이 글썽하기도

다른 애들이 롱 패딩 같은 거 입고 오면 그 친구들은 “자식들~ 뭐가 춥다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냐” 침 찍 뱉어가면서 말하지만 그 영혼은 떨고 있는 게 눈에 보였어요.
그다음부터는 ‘왜 추운 날 이렇게 입고 왔냐’ 이런 소리 안 하고 오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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