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상 할머니의 진실

김재연 前 KBS PD 국장

“며칠은 굶은 것처럼 깡마른 할머니가 신문지를 팔고 라면을 하나 사려고 합니다. 설탕물만 먹은 것 같은 할머니는 라면 하나를 사 옵니다”
고물상 할머니를 묘사한 내레이션이다. 그 장면을 찍은 박지현 VJ도 함께 우는 장면이 촬영되어 방송에 화제가 되었다. 높은 시청률만큼 시청자의 반응도 뜨거웠다.
얼핏 위의 멘트만 들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폐지를 수거하는 대부분의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진실일 수도 있으니까. 일부러 감동을 얻어내거나 자극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 고단한 삶을 우리 모두가 위로하자는 의미에서 감성적으로 멘트가 작성된 것이다.
그러나 방송이 나가자마자 할머니의 가족으로부터 항의 전화가 걸려 왔다. 할머니를 소개하는 멘트가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고 하였다.

“며칠 굶은 것처럼 깡마른 할머니가…” 방송 멘트 나가자 비난받은 가족이 항의 전화를

가족들은 시골에서 상경한 할머니에게 충분히 용돈도 드리는데 손주들 용돈을 줘야 한다면서 밖으로 나가서 일을 한다고 했다. 게다가 할머니를 굶기지 않았는데, 마치 자식들이 부모를 홀대하는 것 같은 인상을 풍겨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욕설과 비난을 받았다고 했다.
방송을 제작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항의와 고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특히 다큐멘터리 감독에게 그런 일은 일상과도 같다. <다큐 3일>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고물상 72시간을 다룰 때의 일이었다.
할머니에게 약간의 치매가 있었는데 할머니의 서술에만 의존하다 보니 벌어진 오해였다. 가족들의 요구대로 다시보기를 중지하고 프로그램 담당 PD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편집할 때 무심코 지나쳐 버린 내레이션이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한 할머니가 고물상으로 들어오신다. 나이는 여든 정도. 신문지를 파셨다. 그 돈으로 라면 한 봉지를 사셨다. 할머니는 설탕물로 허기진 배를 채우셨다고 했다”

이것이 분명 사실(fact)이다. 하지만 ‘며칠을 굶은 것처럼’, ‘설탕물만 먹은 것 같은’ 수식어를 사용하여 가족들이 돌보지 않는 불쌍한 할머니로 과장되게 묘사한 것이었다.
그것은 가공이었다. 그 가족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도저히 넘겨 버릴 수 없는 왜곡 보도였던 것이다. <다큐 3일>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해서 그 가족에게 상처를 준 데 대한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그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뼈저리게 참회하는 마음뿐이었다. 리얼리티를 사명으로 현장에서 평생을 바쳐 온 PD 경력이 송두리째 가짜인 것처럼 치부되는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다.
담당 PD 역시 너무나 괴로워했다. 결국 할머니의 가족을 설득해서 왜곡된 내레이션을 수정하고 다시 방송으로 내보내는 것을 허락받았다.
고발과 항의에 관한 일화가 더 있다. <신화 창조의 비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할 때 섬유업체를 다루면서 경쟁관계였던 일본의 섬유업체를 같이 취재해 방송했다.
방송이 나간 후 일본 기업에게 단어 하나하나까지 꼬투리를 잡히며 고발되었다. 우리나라의 기업이 그들보다 더 돋보이고 우위에 있는 듯한 어감을 풍겼던 것이다.

‘신화 창조의 비밀’ 방송 후 일본 기업에게 단어 하나하나까지 꼬투리 잡히며 고발 당해

결국 잘못을 인정하고 일본 기업이 고발 대상으로 지목한 단어를 뺀 채로 수정하여 사과방송을 내보냈다.
방송을 하면서 방송국의 입장, 시청자의 입장뿐 아니라 취재 대상자의 입장까지도 종합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함을 뼈저리게 통감했다.
그 후로는 시청자의 눈물 짜내는 감성적인 내레이션보다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고 그럼으로써 결국엔 더 좋은 방송이 될 수 있었다.

김재연 前 KBS PD 국장
<도전하고 질문하고 의심하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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