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과 프랑스로 입양되어

Yann Larrere 손창수 사업가

당신처럼 프랑스로 입양된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요?

얼마 전 저처럼 프랑스로 입양된 한국인을 만났어요. 처음엔 정말 반갑더라고요. 근데 이내 마음이 무거워졌어요. 제 입양 경험만으로 해외로 입양된 사람들이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한 아이는 아직 어린데도 혼자 살고 있었어요. 입양될 당시 양아버지 될 분이 딸을 원했는데 실상 양어머니는 딸을 원치 않았던 거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어머니는 혼자 살고 싶어 했대요.
삶이 불안한 아이들은 어떻게든 한국으로 가 자신을 낳아준 가족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문제는 아이들이 한국을 다시 찾았을 때 어떤 부모들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한대요. 이미 가정을 꾸리고 있어서 옛 자녀를 만나고 싶지 않은 거죠.

손자(동생의 아들)를 안고 활짝 웃고 있는 양부모님
입양되던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어느 날 갑자기 고아원에서 저와 제 동생을 비행기에 태웠어요. 무슨 일인지 몰랐어요. 어느새 저는 파리 오를리Orly 공항에 도착했어요.
당시 여섯 살이었는데 네 살짜리 동생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고 해요. 사방에 처음 보는 백인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정말 많은 장난감을 받았는데 기쁘지 않았어요. 고아원에는 장난감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저를 공항까지 데려갔던 보호자가 갑자기 초록색 눈을 가진 금발 여성에게 밀어 넣는 거예요. 바로 제 어머니가 될 사람이었어요.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한 저는 바닥을 굴러대며 소란을 피웠죠.
저는 동행한 한국인을 붙잡고 “날 떠나지 마, 날 떠나지 마” 외쳤어요. 그랬더니 그가 “걱정 마. 널 두고 떠나지 않아” 안심을 시키는 거예요. 그러고는 얼마 후 저를 양어머니 차에 태우고 문을 닫고 떠나버렸어요. 저에게 잘 가라는 작별 인사조차 안 해주고 가버리더라고요.

입양아들은 어떻게든 한국 가족을 찾으려 하지만 이미 가정 꾸린 친부모들은 옛 자녀 만나고 싶지 않다고

것도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말하기 힘들었겠죠. 하지만 당시는 충격이었어요. 그래서 한동안 동양인을 굉장히 싫어했어요.
부모님은 저희가 한국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셔서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는 한국인까지 섭외를 다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그 선생님을 계속 거부했어요. 한국말도 싫고 한국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어머니께 얘기했죠. 그날 어머니가 제 얘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보듬어줬던 기억이 있어요.

낯선 사람들을 따라 어딜 가게 되었나요

할머니가 사는 프랑스 시골 마을 ‘라 시오타’까지 가게 됐어요. 부모님이 아프리카 가봉 주재원이셨기 때문에 양어머니와 일주일 정도를 할머니 집에서 머물게 된 거죠.
차 타고 가는 동안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고 싶지 않았어요. 동생은 상황을 잘 모르니 저만 졸졸 쫓아왔어요. 그러다 주유소에 들렀는데 프랑스 유명 만화에 나오는 ‘골도락’ 로봇을 보고 저도 모르게 가리켰나 봐요. 어머니는 바로 그 로봇을 사다 주셨어요. 그 이후로 음료수도 몇 모금 마시고 조금 웃기도 한 것 같아요.
그날, 처음으로 침대에서 자게 됐는데 자다가 떨어졌어요. 어머니가 매일 밤마다 꽝~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셨대요.(웃음) 그래서 어머니가 침대 주위에 엄청나게 많은 쿠션을 깔아주셨던 기억이 나요.

입양 전 고아원에서 어떻게 지내셨나요?

다섯 살 때 고아원에 도착한 이후로 고아원 아이들과 큰 방 하나에 모여 잤어요. 바닥에 이불을 죽 깔아놓고요.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어요. 제가 무릎을 꿇고 있으면 원장 선생님이 저에게 과자를 던지셨어요. 그렇게 받은 과자를 저는 고이 간직했다가 제 동생에게 줬어요. 당시 먹을 게 조금이라도 생기면 동생에게 주려고 거의 모든 음식을 숨겨두곤 했었어요. 손을 내밀었는데 빗자루로 머리를 맞은 적도 있고요.
다섯 살 아이가 얼마나 객관적이겠어요. 제 기억이 백프로 다 맞지는 않겠지만 느낌은 부정적이에요. 지금은 고아원도 아이들이 너무 많아 통제하기 어려웠겠구나 싶어요.

양어머니가 간직한 고아원 사진. 손창수와 동생 손창규
입양 후 양부모님도, 당신과 동생도 적응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냈겠어요

양할머니 집에서 일주일 지낸 뒤, 양부모님 집이 있는 아프리카 가봉으로 갔어요. 가봉행 비행기를 타니 주위가 온통 흑인인 거예요. 프랑스에서 일주일간은 백인들만 봤었는데… 너무 신기해서 비행기에서 흑인들 머리카락을 만졌던 기억이 나요.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연신 사과하며 승객들에게 설명하셨대요. 어린아이 둘을 입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의사소통이 안 된다고…
가봉에 도착해보니 저만이 쓸 수 있는 큰 방에 침대도 있는 거예요. 근데 그 큰 방에서 혼자 자는 게 오히려 무서웠어요.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던 거죠.

한국 고아원 떠나 파리 공항 도착 후 바닥 굴러대며 소란, 한국인 붙잡고 “날 떠나지마, 날 떠나지마” 외쳤지만

결국 부모님은 저희 침대를 안방으로 옮겨주셨고 부모님과 두 달 동안 함께 잤습니다. 같이 자면서 부모님의 부드러움과 애정을 많이 느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의외의 어려움도 생겼어요.

양부모님은 어떻게 아이 둘을 입양할 생각을 하셨을까요? 한 명도 어려운데…

Yann Larrere 손창수 사업가
PAPA YANN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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