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재 방송작가
20년 지나 지킨 약속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의 빚 하나쯤은 안고 살게 마련이다. 어쩌면 영영 갚을 수 없는. 내게 있어선 아버지가 그렇다. 평생을 엄하고 꼿꼿한 모습으로 가족들 위에 군림하셨던 아버지.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의 빚 하나쯤은 안고 살게 마련 내게 있어선 아버지가 그렇다
아버지는 맏딸인 내가 늘 ‘남의 집 열 아들 안 부러운 딸’이길 원하셨다. 늘 모범적이어야 했고 공부도 잘해야 했으며 직장도 번듯하기를 원하셨다. 행여 당신 뜻에 못미친다 싶으면 무섭게 화를 내셨다. 내가 보기에 아버진 크게 성공하지도, 부유하지도, 그렇게 세상을 폼나게 살지도 못하셨으면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쉰아홉의 아버지가 쓰러지셨고, 이후 8년을 병마와 싸우다 돌아가셨다. 한때 잊고 싶었던 과거의 한 부분이었던 아버지…
하지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에 대한 어두운 기억보다는 따뜻한 기억만 남는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딸의 공부하는 모습이 궁금해 출근길에 학교에 들러 유리창 너머로 몰래 지켜보다 가시던 일, 색종이를 삐뚤빼뚤 오려 만들어드린 카네이션을 자랑하느라 복잡한 출퇴근 버스도 아랑곳 않고 하루 종일 양복 주머니에 꽂고 다니시던 일… 그 조각조각들을 떠올리며 나는 종종 행복해진다.내가 좀 더 일찍 아버지와 화해했더라면… 그동안 잊고 있었던 또다른 모습의 아버지와 따뜻하게 조우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영화 ‘마이 라이프’의 밥 존스는 나보다 좀 더 행복한 사람인지 모른다.
LA의 성공한 광고업자 밥 존스는 어느 날 암을 선고받는다. 연봉 250만 달러에 아름다운 아내 게일, 얼마 후면 태어날 아이까지…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던 그의 삶은 하루 아침에 산산조각이 난다. 그에게 허용된 시간은 불과 서너 달… 밥은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만이라도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어본다.
밥은 태어날 아이를 위해 아버지로서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비디오에 남기기로 한다.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은 어땠는지부터 좋은 음악 고르는 법,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인사하는 법, 면도하는 법, 죽음이란 무엇인지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 병은 더 깊어지고 아내 게일은 밥에게 한 의사를 소개해 준다. 그는 밥에게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증오와 분노를 버리라고 한다. 밥은 애써 그 사실을 부정하지만 결국 어렵게 그 증오와 분노를 마주한다. 그것은 바로 고향 디트로이트에 살고 있는 가족이었다.
고물상을 하는 아버지는 늘 일에 바빠 어린 밥이 그토록 기다리던 서커스 관람 약속마저 지키지 못한다. 무능력한 아버지와 대를 이어 고물상을 하겠다는 동생, 비행기를 타지 못해 디트로이트 밖으로는 나가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엄마.
결국 집을 뛰쳐나온 밥에게 디트로이트는 애써 피하고 싶은 과거일 뿐이다. 아내의 권유로 고향 방문을 해보지만 서로의 오해와 갈등만 확인할 뿐이다.
그 사이 아이가 태어나면서 밥은 잠시 행복을 맛본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자신 역시 아이에게 똑같은 실수를 할 수 있는 아빠가 될 수 있음을. 밥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를 한다.
디트로이트에서 2천 마일을 날아온 가족들은 밥을 위해 마지막 선물을 준비한다. 어린 밥이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서커스가 집 뒤뜰에서 화려하게 펼쳐진다.
아버지는 밥에게 말한다. “안 하는 것보다는 늦는 게 나아” 아버지는 늦게나마 약속을 지킨 것이다. 아버지와의 화해로 밥은 진정 자유롭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는다. 나 역시 좀 더 일찍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었더라면, 이토록 오래까지 무거운 짐을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린 아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서커스 집 뒤뜰에서 아버지 20년 지나 약속 지켜
얼마 전 한 선배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치매에 걸려 맘고생이 상당했단다. 그 선배가 그랬다. 살아계실 땐 그렇게 지긋지긋했는데 지금은 너무 보고 싶다고. 하지만 그 세월이 너무 힘드니 딱 1주일만 살아 오신다면 너무 잘해 드리고 싶다고.
누군가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면 늦기 전에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하자. 그것은 상대뿐 아니라, 진정으로 나를 자유롭고 평화롭게 하는 길이기에…
이수재 방송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