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윤 학
“이재용 구속하라!” 거리에 나부끼는 플래카드가 보인다. 침울한 표정으로 말없이 법정에 들어서던 그가 스쳐 간다. 수조 원 재산을 갖고 있지만 부러워 보이기는커녕 안쓰럽다. 그 어떤 중범죄자도 안 받는 치욕을 그는 왜 그렇게 요란스럽게 받는 것일까.
나는 이재용이 전 재산을 국민 모두에게 나누어 주면 어떨까 생각해보곤 했다. 그러면 그도 그런 소리를 듣지 않을 것 아닌가. 나는 그의 재산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찾아보았다. 세계 500대 부호 명단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228위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이재용 12조 8천억. 세계 최고 부자 일론 머스크 301조와 비교하니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세계 초일류기업으로 알고 있던 삼성전자 회장 재산이 그 정도밖에 안 되다니 놀랍기만 했다.
문득 그 500명 부호 중에서 매일 “구속하라”는 외침을 듣고 사는 부자들은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았다. 선진국에서는 부자를 적대시하기보다 존경한다니까 그런 외침에 시달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외국 부자들은 위법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일까? 그러나 기업을 하면서 하늘의 별처럼 촘촘한 국내외의 수많은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틈만 나면 “재벌을 구속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일까.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는 왜 기업을 계속해나가는 것일까.
최근 일본경제연구센터는 일본의 1인당 국민 소득이 한국에 역전되리라고 전망했다. 그 주역이 삼성 아닐까. 실제로 외국에 나가보면 과거 소니 광고 대신 이제는 삼성 광고를 자주 본다. 삼성은 ‘산업의 쌀’이라는 반도체 산업에 80년대 초 과감하게 거액을 투자해 지금은 일본을 훨씬 앞질러 일본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이렇게 삼성이 우리 경제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듣지만 “이재용 구속하라”는 소리는 더욱 커가고 있다. 이재용이 영원히 감옥에서 지내야만 국민들은 속이 시원할 것인가.
반일정서가 큰 사람일수록 오히려 그의 구속을 소리높여 외치니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반일을 외치는 사람들이야말로 일본에 앞서가는 기업을 옹호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이재용이라면 짧은 인생 시달리지 않고 편히 살고 싶을 것 같다. 그의 전 재산 중 8천억만 남기고 12조를 국민 모두에게 나눠줘 버리면 구속하라는 말은 쑥 들어가지 않을까. 그러면 그는 구속하라는 말 대신 세계 최고의 자선가로 칭송받고 살 텐데… 그의 재산 12조 원을 5천만 명으로 나눠봤다. 국민 한 사람당 24만 원씩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재벌은 내 재산을 빼앗아 부를 축적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가 내게서 가져간 돈은 불과 24만 원 아닌가.
고향사람과 동창들에게 1억 원씩 나눠준 기업인에게는 칭송이 자자하다. 그러나 산업을 일으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일자리를 창출해 국민의 소득수준을 올리는 데 기여한 사람에게는 구속하라고 외친다. 법을 위반한 대가는 치러야 하지만 구속하라는 소리만큼이나 그들이 일궈낸 성과도 칭찬해 주어야 옳지 않을까.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것은 칭송받을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금이어야만 할까? 산업을 발전시켜 고용을 창출하고 기술을 익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가진 것을 나눠주는 것이 아닐까.
성경을 보면 먼 길을 떠나면서 맡기고 간 한 달란트를 그대로 묻어둔 종을 주인이 돌아와서 어둠 속에 던져버리라고 했다. 반면에 다섯 달란트를 더 불린 종에게는 그 한 달란트까지 마저 주라고 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예수도 가진 것을 활용하여 늘리는 사람을 우대했다. 우리에게도 그런 사람이 필요한 시대다.
선거 때만 되면 돈을 풀어야 한다는 정치인이 늘어간다. 마치 그것이 국민들을 잘살게 하는 일인 양 목청을 높인다. 그런 정치인일수록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재용을 감옥에 처넣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다섯 달란트의 종일까 한 달란트의 종일까.
예수는 부자 청년에게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간 부자 청년과 달리, 이재용이 전 재산을, 아니 삼성이 전 재산을 국민들에게 내놓는다면 우리는 그를 칭송해야 할까?
일본은 반도체산업 경쟁자가 사라졌다며 만세를 외칠 것이다. “이재용 구속하라”는 소리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누군가를 구속하라는 소리는 과연 사라질까. 오늘도 우리는 칭찬보다 누구를 구속하라는 소리를 듣는다. “이재명 구속하라!” “김건희 구속하라!” 구속시키고 싶은 사람이 많은 나라, 구속하라고 소리치는 국민들이 많은 나라, 그런 나라에서 누가 국민을 위해 진정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겠는가?
선한 꿈을 안고 무언가를 하다가도 사업이 커지면 사람들이 비난할 게 두려워 사업을 키우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재용의 불법을 용인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면 누구누구를 구속하라는 것은 생각해 볼 일이다. 더 나아가 누구를 구속하자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큰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누구의 죄를 묻기 전에 내가 죄를 짓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내가 구속시키고 싶은 사람보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사람들이 늘어가면 좋겠다. 그런 사람들이 늘어갈 때 진정 정의로운 나라가 아니겠는가.
발행인 윤 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