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경 사회복지학과 교수
100세 시대
지난 10여 년에 걸쳐 천여 명의 은퇴자들을 만나며 가장 많이 떠올랐던 단어는 ‘후회’였다.
은퇴자들이 들려주었던, 고통스럽고 슬펐던 진실을 그냥 이대로 묻어둘 수 없어 연재한다.
“돌이켜 보니까, 나 자신한테 너무 가혹했어요. 나 자신을 위한 사치가 꼭 필요했는데…”
A씨(57세)의 말을 듣고, ‘사치’라는 단어가 가슴에 와닿았다.
“어렸을 때는 사치가 다 나쁜 건 줄로만 생각했는데, 은퇴하고 보니까 작지만 확실한 사치를 누렸던 사람들이 하나둘 눈에 띄더군요. 특히 악기 하나쯤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제일 부러워요”
나는 그제야 A씨가 말하는 ‘사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사치란 악기 하나쯤 연주할 수 있다거나 자신만의 취미활동을 할 수 있는 그런 여유를 의미한다는 걸.
“지금 생각해 보니까 돈 때문에 뭘 못 한다는 건 변명에 지나지 않았어요. 내가 아무 취미도 갖지 못한 건 돈보다는 마음이 움츠러들었기 때문이죠.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게 뭘까? 재미있는 게 뭘까? 진작 고민했어야 했는데… 그럴 마음이 없었어요”
A씨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며칠 전에 갔다 온 친구 딸의 결혼식 때문이었다고 했다. 10년 전 아내와 사별한 후에 혼자 남매를 키워온 A씨의 친구가 딸을 결혼시키는 자리였는데, 친구가 딸의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로 클라리넷을 연주했던 것이다. 결혼식장은 그야말로 감탄과 감동의 도가니가 되었다고 한다.
“친구들 모두 눈물을 흘렸어요. 그런데 그 눈물은 슬퍼서 나는 게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걱정했죠. 상처한 후에 혼자 남매를 키워온 친구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게 고생하며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친구가 초라하고 불쌍해 보이면 어떻게 하나. 그런데 그건 모두 기우였어요. 그날 연주를 하는 친구가 어찌나 당당하고도 멋져 보이던지… 슬픔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느낌이랄까, 그날 ‘나도 저렇게 멋있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그날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은 신부 아버지의 연주가 끝난 후에 기립박수를 쳤다고 한다. 결혼식 하객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치는 그 모습도 가히 ‘예술’이었다. A씨는 그날 단단히 결심했다고 한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나만의 취미를 가지고 열심히 연습하리라. 악기를 연주하면서 남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고.
취미가 있는 사람의 행복도가 더 높은 이유를 전문가들은 ‘행복의 포트폴리오 효과’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취미를 즐기는 사람은 행복감의 원천이 여러 개다. 일에서만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일이 잘되지 않으면 행복감을 잃지만, 취미를 즐기는 사람은 일 이외의 것에서도 행복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취미가 있는 사람은 남도 행복하게 한다. A씨의 친구는 딸은 물론 결혼식 하객 모두에게 행복감과 감동을 선물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아니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먼 훗날을 위해 오늘을 희생 제물처럼 바치는 그런 생활은 다시는 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 주변에는 A씨처럼, 내일의 성과를 위해 오늘의 즐거움을 희생하거나 미뤄두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이렇게 결심할 필요가 있다.
나에게 위안을 주고 때로는 남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작은 사치 하나쯤 놓아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리라. 사치스럽다며 옥죄는 내면의 죄의식 같은 건 모두 날려 보내리라.
한혜경 사회복지학과 교수
한국보건사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