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벽보의 그 사람

발행인 윤 학

정치가 엉망이라 “모든 게 어렵다”는 이야기가 무성하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반세기가 넘도록 나는 ‘정치가 엉망이다’ ‘사는 게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 정치를 잘하면 국민들이 정말 잘 살까? 그동안 우리는 더 나은 정치를 바라며 수없이 정권교체를 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는 엉망이다. 그런데 우리는 놀라운 경제성장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꼭 정치에 좌우되는 것일까?

정치 엉망이라 모든 게 어렵다! 그런데 놀라운 경제 성장을?

청년 시절, 고소득자에게도 자가용은 그림의 떡이었다. 자취하던 주인집에도 전화기 한 대 없어 광화문 우체국까지 가서 시골집에 전화해야 했다.
그러나 블루칼라 노동자도 외제 차를 모는 시대가 되었다. 어린이들도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 어두컴컴 반지하에서 살던 시민들이 쑥쑥 올라간 전망 좋은 아파트로 옮겨가고, 여차장의 “오라이~” 소리와 함께 문도 못 닫는 만원 버스에 매달려 가던 시민들이 냉난방 자가용과 전철로 이동하고 있다. 이런 세상의 변화를 보면 “우리는 지금 너무 잘살고 있어요” 외쳐야 한다.
그런데 모든 게 어렵다니? 코끼리 밥솥, 소니 워크맨, 도요타 자동차… 예전에 우리는 일본을 동경했다. 그러나 요즘 일본은 대졸 초임이 200여만 원에 불과한데도 취직자리가 없다. 점심엔 3, 4천 원 하는 우동이나 소바를 먹으려고 긴 줄을 선 젊은 직장인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작은 집, 비좁은 식당, 단출한 음식… 매사 조심스러운 그들을 보면 우리의 활기찬 삶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사실 우리 정치는 엉망이었다. 유신과 전두환 독재를 거쳐 운동권 아마추어 정권, 내로남불 정권, 검찰총장 정권에 이르기까지. 눈치껏 공천만 받으면 그만이라는 기회주의자들을 보며 국민들은 정치인을 사기꾼 취급한다. 그러면서도 대다수 국민들은 정치인에게 기대를 건다. 사기꾼에게 맡겨 놓고 사기꾼 때문에 못 산다고 하면 말이 될까?
파리 시내를 걷다가 나와 아내는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었다. 대한민국 선거 포스터에서 수없이 봐왔던 인상의 인물들이 거기 있는 게 아닌가.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애써 짓는 그 거짓 미소와 부실한 그 표정, 줄 것도 없으면서 뭔가를 줄 것 같은 그 허세… 프랑스 정치인도 똑같네? 아내와 나는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국민들, 정치인 사기꾼 취급하면서도 사기꾼 때문에 못 산다고?

그 후 일본 길거리 선거 포스터 에도 대한민국과 프랑스에서 보았던 그 부실한 표정의 정치인들이 어쩌면 그렇게 똑같이 벽에 붙어있는지. 아! 저 부실한 사람들에게 좋은 정치를 해달라고 기대해 왔구나. 저런 사람들에게 엄청난 권한을 주니 그들이 어떤 짓을 해왔겠는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1차·2차 세계대전과 6·25도, 많은 이들을 경제적 고통에 빠뜨린 IMF도 저들에게 감당도 못 할 엄청난 권한이 주어졌기 때문 아닌가.

지금 우리는 여소 야대 정권이다. 거대 야당도, 대통령도 마음대로 뭘 못하게 되어 있다. 만약 여당이 다수당이라면 윤석열 대통령은 거침없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을까? 반대로 다수당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이재명은 또 어떤 일을 꾸미고 있을까? 여당은 다수당인 야당의 반대로, 야당은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되는 일이 없다고 서로 비난하고 있지만 국민으로서는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대통령은 야당의 협조 없이도 주어진 권한 내에서 잘해 나갈 일이 수없이 많다. 인사를 잘하고 민생을 챙기고 이미 만들어진 좋은 법을 잘 집행하려고만 해도 할 일이 태산일 것이다. 그런데도 야당 탓만 한다. 야당은 대통령도 환영할 법안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거부권을 행사할 법안만 골라서 통과시키면서 대통령을 탓한다. 이쪽도 저쪽도 진짜로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으면서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트집거리 잡기에는 열중이다. 왜? 상대를 넘어뜨려야 내게 힘이 생긴다는 동물적 감각에 의존해 지금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치인의 속성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의 삶을 맡기려 하면 되겠는가. 주어진 권한으로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권한만 더 커지면 대단한 일이라도 해줄 것처럼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사기꾼과 어떻게 다른가.

적은 돈을 큰돈으로 부풀려 주겠다는 사기꾼에게 의지할 생각만 버리면 누구든 제힘으로 살려 할 것이고 곤경에 처할 일도 없다. 우리가 정치 때문에 어렵게 산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부실한 정치인에게 기대를 걸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는 ‘정치’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정치에 대한 관심을 ‘정치인’에 대한 관심과 기대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본인 아버지의 모교는 몰라도 정치인의 학력, 경력, 인척 관계를 줄줄이 꿰는 국민들이 너무나 많다. 정치인들도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한다. 그러나 정치인들에게 관심을 가질수록 그들의 힘은 커간다. 그들의 힘을 키워주는 것, 그보다 더 큰 정치 무관심은 없다.

‘정치’에 대한 관심을 ‘정치인’에 대한 관심과 기대로 착각

현자들은 민주주의의 요체는 권력의 견제와 균형이라고 했다. 그 부실한 정치인들이 자기 멋대로 권한을 남용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견제와 균형!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에 대한 관심이다!
유신 시절 아버지는 투표장에 가면서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유신을 반대해도 선거 결과는 뻔했기 때문이었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나도 한숨이 나온다. 아무리 현명한 투표를 해도 정치인들은 바뀌지 않을 것이기에. 그러나 아버지와 나는 다르다.
아버지는 기대를 걸었던 정치인에게 나는 기대를 걸지 않는다. 나는 이번 선거에서 어느 정파에 힘을 더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사기꾼에게는 경계심이 필요하듯 정치인에게는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
선거보다 더 귀한 일은 내가 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다. 정치인에 대한 기대는 접고 견제와 균형의 정치를 만드는 것, 그것이 이번 선거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발행인 윤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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