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해욱
70여 년 전, 일본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일 년에 몇 차례 농작물을 멀리 도시에 가서 내다 팔곤 했지요. 어느 이른 아침, 그들은 소달구지에 농작물을 가득 싣고 도시로 향했지요. 아들은 밤낮없이 걷는다면 이튿날 아침 일찍 도시의 시장에 도착할 것이라고 계산했답니다. 그는 소를 채찍질하면서 더 빨리 걷도록 다그쳤지요.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천천히 가자, 아들아. 소도 오래 걸어야 하잖니?”
아들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남들보다 일찍 시장에 도착하면 더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어요”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다만 모자를 눌러쓰고 소달구지 위에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한참을 달게 자고 난 아버지는 고삐를 넘겨받고 소를 몰았습니다. 두 갈래 길이 왔을 때 아버지는 오른쪽 길로 몰았지요. 아들이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왼쪽으로 가면 지름길이에요!”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나도 안다. 하지만 이 길이 경치가 더 아름다워”
아들이 참지 못해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시간 개념도 없으세요?”
“아니지. 나야말로 시간 개념이 철저한 사람이란다. 그래서 매 순간 충분히 아름다움을 즐기려는 거야”
들길은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계속 이어졌습니다. 들꽃과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속이 끓어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날의 저녁노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땅거미가 질 무렵 아버지는 들꽃의 향기를 맡으며 소를 멈추었습니다.
“아들아,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 아침에 떠나기로 하자. 소도 쉬어야 하니까”
아들이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제 아버지와 함께 시장에 가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는 돈을 버는 일보다 저녁노을이나 감상하고 풀꽃 냄새 맡는 데만 더 관심이 있어요”
아버지는 다만 빙그레 웃고 스르르 눈을 감았습니다. 밤은 천천히 흐르고 아들은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조바심이 난 아들은 아버지를 깨웠습니다.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은 농부를 만났습니다. 농부는 웅덩이에 수레가 빠져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내려서 저 농부를 좀 거들어 주어야겠다”
불평을 하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다시 말했습니다. “아들아, 우리도 나중에 웅덩이에 빠질 수가 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걸 잊으면 안 돼”
결국 셋이 힘을 합쳐 농부의 수레를 웅덩이에서 꺼냈을 때는 이미 아침 8시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도시는 아직 멀리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거대한 섬광이 하늘에 번쩍이더니 천둥 같은 소리가 뒤따랐습니다. 산 너머 하늘이 잿빛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도시에 큰비가 내리는 모양이구나”
아들이 볼멘소리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서둘렀더라면 지금쯤 농작물을 다 팔고 돌아오고 있을 거예요”
아버지가 부드럽게 아들을 타일렀습니다. “마음을 편안히 가져라. 한두 해 농사짓고 말 일이 아니잖니. 네 인생의 매 순간을 잘 즐길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오후 늦게야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멈춰 서서 오랫동안 도시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침묵을 깨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이제 아버지가 하신 말씀의 뜻을 알겠어요” 그들은 소달구지를 돌려 한때 히로시마라고 불리던 도시를 등지고 천천히 언덕을 내려왔답니다. 그날은 바로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진 날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조금만 더 서둘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농부의 수레를 웅덩이에서 꺼내주기 위해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그냥 갔더라면! 그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많은 일을 이루며 산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더 많은 일을 이루기 위해 ‘더 빨리, 더 많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삽니다. 그것이 참으로 잘 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아버지가 했던 말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나는 매 순간 충분히 아름다움을 즐기려는 거야”
아름다운 세상을 ‘빨리빨리’ 지나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천상병 시인처럼 하늘나라에 가서 “이 세상 아름다웠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류해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