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땅만 밟고 사는가?

하광룡 변호사, 前 판사

법정 풍경 <판사는 이렇게 재판한다>

선고일에 나는 두 가지 판결을 준비했다. 피고인이 선고일에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형 집행유예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실형을 선고할 참이었다.

농장 주인이 농장 내 건물을 목공소로 임대하고 있었는데 그 목공소 주인과 사이가 나빠졌다.
그러던 중 그 목공소에 목재를 운송해 주는 용달차가 들어왔는데 농장주인인 피고인이 그 용달차가 농장에 무단 침입했다는 이유로 농장 출입문을 잠가 용달차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몇 번이고 와서 농장 출입문을 열어주라고 했다. 그런데 농장주는 배짱을 내밀며 장장 22일이나 용달차가 나가지 못하게 하여 용달차의 운송업무를 방해했다. 이에 용달차주는 농장의 언덕을 무너뜨려 길을 내어 탈출한 후 농장주를 고소했다.
농장주는 수사 기간은 물론이고 재판 기간 내내 용달차주가 승낙 없이 농장에 침입한 것이 잘못이지 이를 나가지 못하게 한 피고인은 잘못이 없다, 오히려 용달차주가 민사소송으로 차량 인도 소송을 할 것이지 자력으로 농장 언덕을 무너뜨리고 탈출한 것이 더 큰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그 사건의 선고일에 나는 두 가지 판결을 준비했다. 피고인이 선고일에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형의 집행유예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실형을 선고할 참이었다.

경찰이 농장 출입문을 열어주라고 했지만 농장주는 배짱을 내밀며 용달차가 나가지 못하게 했다. 용달차주는 농장 언덕을 무너뜨려 탈출한 후 농장주를 고소했다.

당시는 판사들이 악명이 높아질 것을 염려해 구속을 거의 안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피고인에게 “이 사건 공소사실에 대하여 아직도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나요?”라고 물었다.
피고인은 여전히 “저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농장에 침입한 자가 잘못 아닌가요? 차량 인도 소송을 할 것이지 왜 남의 농장 언덕을 허물고 차량을 가져가나요?”라고 반문하였다. 그래서 나는 피고인에게 물었다.

“피고인은 오늘, 이 법정에 나올 때 모두 피고인의 땅만 밟고 왔나요?”

그 물음에 피고인은 대답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 자기 땅만 밟고는 살 수 없습니다. 자기 땅 밟고 있는 시간보다 남의 땅 밟고 있는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농장이 자기 땅이라 하더라도 목공소를 임대한 상황이라면 목공소 운영과 관계되는 차량이 일시 들어오는 것은 허용한 상황이고 또 허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럼에도 억지를 부리며 궤변을 늘어놓고 있으니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야 하고, 남의 땅을 밟고 사는 시간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피고인에게는 응당히 반성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는 취지로 말하고, 실형을 선고하고 단호히 그를 법정 구속시켰다.

하광룡 변호사, 前 판사

spot_img

新聞이냐 舊聞이냐

발행인 윤 학 그림 이종상 어릴 적부터 신문을 보아왔다. 그런데 10년, 20년, 30년 신문을 보면 볼수록 신문新聞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좌절된 신의 한 수

박경민 경영컨설턴트 일본을 알자! 일제 강점기 36년간의 굴욕은 일본의 개항과 조선의 쇄국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본만 탓할...

색 예쁘다는 눈 먼 어머니

Rawia Arroum 소설가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아침 늦은 시간까지 어머니가 방에서 나오지 않아 한참을 기다리다가 방으로 올라갔다.어머니는 침대에 앉아 있었고, 햇살이...

사슴 숨겨준 포도나무

이솝우화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슴 한 마리가포도나무 밑에 숨었다. 포도나무가 숨겨준 덕분에사냥꾼들은 사슴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안심한 사슴은 포도나무 잎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 사냥꾼...

기생에게 ‘여사’ 존칭?

김재연 前 KBS 국장 형님은 사극 연출가로 승승장구하면서도 오래도록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 기저에는 젊은 날의 트라우마가 자리하고 있었던...

관련 기사

북한 총리를 증인으로!

하광룡 변호사 서울형사지방법원 배석판사 시절 이른바 운동권들의 활동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 많았다.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의 공소장은 서두에서 항상 북한공산집단은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고 적화통일을 하려는 반국가단체라고...

그 악인이 선행을 했다고?

판사는 이렇게 재판한다 하광룡 변호사 고위 공무원의 아들 행세를 하며 사귀는 여성으로부터 중고 외제차 수리비, 용돈 등을 편취하다가 여자를 사창가에 팔아 넘기기까지 한 사람이 고등법원 우리...

그 검사의 청탁

판사는 이렇게 재판한다 하광룡 변호사 꽤 늦은 시간 음식점에 술 취한 젊은 남자가 들어와 술을 마신 후 계속 주문했다.여주인이 음식점 문을 닫아야 한다며 이제 좀 나가...

내가 고집 센 판사?

하광룡 변호사 물건 외상으로 매수한 자는 아무런 처벌 않고도로 가져온 사람만 구속하자는 재판장에게 발끈하자 한 상인이 건축자재상에게 건축자재를 외상으로 팔았는데 며칠 안되어 그 건재상이 부도를 냈다.그...

용달차 끈 사고

하광룡 변호사, 前 판사 “일꾼이 적당히 당겨야지 뭘 터지도록 당겼을까?”“용달차주가 당기라고 하면 당기는 거죠!” 직물 공장 직원이 그 공장의 생산물 운송을 의뢰받은 용달차주를 위하여 그 공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