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옥 기자
“이정옥 씨, 이 팩스를 스포츠국에 갖다주세요”
늦은 오후 5시, 국제부 A 차장은 또 내게 팩스 심부름을 시켰다. 이제 7년 차 여기자로 중견에 가까워져 가는 나에게 그는 갓 들어온 남자 후배 기자들이 옆에서 한가하게 손 놓고 있는데도 이런 심부름을 시키곤 하였다.
나는 순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남자 후배에게 시키라고 말할까 생각하다가, 꾹 참고는 국제부로 잘못 온 팩스를 갖다주러 스포츠국에 갔다.
스포츠국에서 나오려는데 스포츠국 게시판에 언론연구원의 해외연수 모집 공고가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메일이 없었던 시대라 커뮤니케이션이 벽보의 문서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2주일 동안 공고가 붙어 있었는데 마감 날 이 공고를 보다니! 나는 얼른 자리로 돌아와 언론연구원에 전화했다.
“KBS 이정옥 기자인데요. 서류를 오늘 준비 못 했는데 어떻게 하죠?”
“그럼 먼저 구두로 신청하고 서류는 다음 주에 내셔도 됩니다”
언론연구원 장학금으로 다녀올 수 있는 파리 기자 연수를 이렇게 해서 신청하게 되었다.
입사 때부터 나는 5년 차 이상이면 기자 연수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나서 늘 게시판을 눈여겨보았었다. 파리 연수를 꼭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자 연수 공고가 왜 보도국 게시판에는 붙어 있지 않았는지 이상했다. 보도국 운영부에 그동안 왜 보도국에는 붙여놓지 않았는지 물어보았다.
“아, 보도국에도 붙였었는데 이상하네. 아마 누가 뜯어 버렸나 봐요”
내가 만약 그때 순간 화가 난다고 스포츠국에 팩스 심부름을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면 나는 그해에 파리 연수 신청을 못 했을 것이다.
내게 심부름시켰던 A 차장 덕분에(?) 나는 연수 공고를 볼 수 있었고 얼마 후 언론연구원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응하게 되었다. 하마터면……! 인생이란 정말 알 수가 없다.
이정옥 기자
어린 시절 꿈많은 문학소녀였지만 아버지와 같은 기자의 길을 걸었다. 연수를 간 파리의 기자학교에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 세계인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된다. 이슬람 원리주의의 나라 이란으로 가 국내 여기자로는 처음으로 차도르를 쓰고 <차도르에 부는 개방 바람>을 특집 취재했다. 1997년 KBS 파리 특파원으로 코소보전, 이라크전, 터키 지진, 예멘 인질 납치 등 치열한 뉴스의 현장을 취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