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민 경영컨설턴트
일본을 알자!
일제 강점기 36년간의 굴욕은 일본의 개항과 조선의 쇄국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본만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우리의 문제점을 깊이 느껴보면서 내일의 한일관계도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는 바람에서 개항 전후의 한일 역사를 돌아보는 연재를 시작한다.
19세기 중반 서양은 수백 년간 쇄국 중인 한일 양국의 문을 똑같이 두드렸다. 일본의 막부 체제는 개항을 선택했고, 조선은 개항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일본은 자발적 근대화에 성공했고 조선은 실패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왜 일본은 개항했고 조선은 거부했을까? 왜 문신 정권 조선은 끝까지 싸우며 자주적 개항을 못한 반면, 싸움이 장기인 무신정권 일본은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개국 결정을 내렸을까? 역사를 배우면서 나는 늘 이 점이 궁금했다.
1853년 미국 페리 제독 함대가 에도만 앞바다에 나타나기 오래전부터 에도막부는 무역과 기술의 중요성을 잘 알아 서구 문물과 기술에는 호의적이었다. 무역의 효용성을 잘 알았기에 나가사키를 통해 제한적으로 네덜란드 상인과의 독점 무역을 허용하고 있었다.
개항하지 않으면 대포의 위력을 보여주겠다는 페리의 엄포에 밀려 미국 대통령의 국서를 받을 때도 일본 관리들이 증기선에 올라 배의 구조와 작동원리, 운행 등에 관해 물어보고 견학했다.
이후 일본은 개국파와 쇄국파의 투쟁이라는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하지만 강경파도 개항을 무조건 반대하는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 서구의 정세와 문물에 눈을 뜨려 했다.
개항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요구에 굴복해 개항 당하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고심하던 막부는 결국 전쟁을 피하되 서양을 이길 국방력을 키우자는 심산에서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고 개국의 문을 열었다. 이것은 메이지 유신으로 나아가는 신호탄이었다.
세계 각국이 근대화와 산업화의 흐름을 탈 때 조선은 여전히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교조적인 성리학과 세습 왕조 체제라는 단단한 껍질로 쌓인 암흑의 세계였다.
조선은 종주국 청나라 외의 세계는 알 수도 없었고 또 알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세계는 조선을 암흑세계에 그대로 놔두려 하지 않았다. 프랑스, 미국, 일본, 러시아, 영국 등 열강이 자꾸 집적거렸다.
이유는 한 가지, 수교하고 통상하자는 것이었다. 조공 대상인 청마저 한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내심 경멸하고 있는 마당에 조선의 위정척사론자들은 아예 서양 오랑캐를 짐승으로 보았다.
털이 북슬북슬하고 눈이 파란 서양 오랑캐하고 수교하고 통상하자고? 서양인을 짐승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수교 통상의 대상으로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결국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쳐 조선은 1876년 초에야 운요호 사건에 의한 일본의 위력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게 된다.
개인사가 그렇듯 한 나라의 역사도 개개인의 의식이 모여 만들어진다. 당시 일본 식자층은 서양을 배우려 했다. 겸손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조선 지배층은 서양을 경멸하고 배우려 하지 않았다. 그 의식 차이가 개항을 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지 않았을까. 그 결과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대개혁의 길로 매진했고 조선은 쇠망의 길을 걷게 됐다고 본다.
박경민 경영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