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물결이 만난 사람
신경호 도쿄 수림학교 이사장
일본 고쿠시칸대학 교수로, 수림일본어학교 이사장으로 일본학생과 한국학생들에게 서로의 언어와 문화 교류에 앞장서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단연 ‘김희수 선생과의 만남’ 덕분이죠. 제가 갓 스무 살 때 일본으로 유학을 갔는데 그해 대한항공 KAL기 폭파 사건, 아웅산 테러 사건이 일어났었죠. 가뜩이나 일본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에게 냉소적이고 우월감을 갖고 있는데 그런 테러까지 연달아 터지니 한국 유학생들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저는 일본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던 재일 교포 재계 거인 두 분을 만나게 됩니다. 한 분은 롯데 그룹 신격호 회장, 또 한 분이 김희수 선생이었어요. 재일 유학생 연합회 회장을 따라 저도 방문 인사를 갔던 거예요. 당시 동경 유학생이 130명이 채 안 되었기 때문에 두 분 다 유학생들에게 용돈을 주며 도움을 주고 있었어요.
김희수 선생은 저희를 당신이 최초로 지은 긴자 건물로 부르셨는데 사무실이 유난히 아담해서 기억에 더 남아요. 어르신은 저희들 소개를 죽 들으시고는 돈 100만 엔을 턱 내놓는 거예요. 지금으로 치면 1000만 엔 정도 되는 돈이에요. 재벌인 신격호 회장이 연합회에 50만 엔을 지원한 걸 생각하면 100만 엔은 그 당시 김희수 어르신에게도 얼마나 큰 거금이었겠어요. 그러면서 “여러분들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고 미래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라. 절대 자긍심을 잃지 말아라” 그래요. 그분이 열셋에 일본에 와 한국말이 어눌해요. 그런데도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묻어나오는 힘이 있었어요. 그때 아~ 저런 게 진짜 ‘말’이구나 깨달았어요.
그 강렬한 만남 이후로 저는 김희수 선생을 그림자처럼 따르기 시작했어요. 그분은 늘 망국의 한과 가난하게 살아온 한, 그리고 못 배운 한을 말씀하셨죠. 한국 사람은 우수한데 못 배워서 다른 나라에 주권을 잃지 않았냐, 아무리 한민족이 우수해도 그 역량을 발휘할 토대가 없어서는 이 한을 풀 수 없다고 확신하셨어요. 그래서 늘 당신 꿈이 ‘사람 남기는 일’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셨어요.
결국 김희수 선생은 그간 모아둔 돈을 투자해 일본에서는 수림외어전문학교를 설립하고, 한국에서는 중앙대를 인수했죠. 그렇게 한일 양국에서 ‘사람을 남기는’ 교육사업에 매진하게 된 거예요. 중앙대를 인수하면서 50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와 인재 양성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얼마나 가슴 뛰어 하셨는지 몰라요. 어느 순간 그분의 꿈이 제 꿈이 되어 있었어요. 제 공부마저 뒷전으로 미루고 각종 허드렛일까지 도맡았죠. 그분 곁에서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도 교육의 길로 들어서게 됐어요.
못 배우고 가난했다는 김희수 선생이 어떻게 나중에 중앙대를 인수할 정도의 거부가 됐나요. 그것도 재일교포로 일본에서…
김희수 선생 집안은 할아버지가 벼슬을 지냈지만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면서 땅을 빼앗기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었어요. 할아버지는 “원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 알아야 한다”며 김희수 선생을 열세 살 때 일본에 보낸 거예요. 조센징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우유배달부터 외판원에 온갖 잡일까지 했어요. 그 와중에 ‘나라가 없으면 국민도 없다’는 것을 뼛속까지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거예요. 물가 폭등에 실업자는 넘치고… 재일교포들 사정은 더 심각했죠. 김희수 선생도 뭐 먹고 살아야 하나 동경을 배회하는데 아이디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