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신자 무용가
미국에 가서도 영문학을 계속 공부하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 달리, 막상 도착하고 나니 이미 그 생각은 사라지고 없었다. 단 한 가지만이 분명했다. “나는 앞으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고 싶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한다” 내가 가진 유일한 명제였다. 그 외에 분명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이, 뉴욕의 한 모퉁이에서 거대한 미국의 모습을 숨죽여 응시하며 나는 새로운 인생을 모색하고 있었다. 당장은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조차 불분명했다. 일단은 그것을 탐색하면서 방황하는 일에 시간을 바쳐야 했다.
한동안 고민한 끝에, 코넬대학교 호텔경영학과에 등록했다. 학교 친구와 함께 값싼 아파트를 얻으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뉴욕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비록 잠깐이긴 했지만 어떻게 그런 분야에 매력을 느끼게 된 건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과 견주어보면 웃음이 난다. 한동안은 열심이었지만, 그야말로 완전히 비즈니스적인 분야라는 사실을 느끼면서부터 앞날을 머릿속에 그려볼 때마다 답답해졌다. ‘이게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일까? 이렇게 돈을 벌어서 무엇 하려고?’ 나는 회의에 빠졌다.
그러던 차에 현대 무용의 대가였던 알윈 니콜라이의 공연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당시 그는 전위 무용을 했는데, 무대와 조명, 리듬, 음향, 동작 등 그를 둘러싼 모든 것 앞에서 나는 어떤 전율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아, 춤으로 이런 세계를 펼칠 수 있구나. 저 한없이 자유로운 춤! 말로 미처 표현할 수 없는 정념과 욕망과 상상과 철학, 그것을 저렇게 손으로, 팔로, 다리로, 온몸으로 표출할 수 있구나, 분출할 수 있구나! ‘저것이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나의 가장 큰 고통은 가슴속 응어리를 분출해 내지 못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분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연을 가장한 숙명’으로 춤이 내게로 찾아왔다.
열에 들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당시 나는 모델 일을 하면서 학교에 다니는 한 여자와 룸메이트가 되어 생활하고 있었다. 침대에 엎드린 채로 꼼짝 않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춤을 출 것이다. 모든 것을 터뜨리고 분출하는 춤을 출 것이다. 내가 침대에 시체처럼 엎드려 있으니 룸메이트가 궁금해하며 무슨 일이냐고 거듭 물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대답했지만, 그날의 일은 내가 일생 동안 겪은 것 중 가장 큰일이었다. 1967년 미국으로 건너간 지 꼭 일 년 만의 일이었고, 그때 내 나이는 만 스물일곱이었다.
다음 날, 나는 유명하다는 무용 카운슬러를 찾아갔다. 카운슬러는 내 나이를 듣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들은 열 살도 안 되어 시작하는데, 스물일곱에 시작하기엔 좀 어렵지 않겠냐면서 고개를 저었다. 육체적으로 적응하기 힘들 테니 무용가로 성공할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 어쩌면 당연한 대답이었는데도,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터라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내가 너무 암담해하는 게 안되어 보였는지 카운슬러는 위로하듯 말했다. “당신은 동양인이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진 않아요”
그 말을 뒤로하고 나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또 잘못 짚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용이다. 이것뿐이다. 포기하진 말자. 단지 어렵다는 것이지 할 수 없다고 말하진 않았다. 가령 내가 무용가로 성공하지 못할지라도… 아니,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 나는 꼭 성공하고 싶다. 성공할 것이다. 내 인생의 해답처럼 다가온 이 무용을 향해 지금 나아가지 않는다면 평생 한이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배우겠다는데 그것을 누가 말리겠는가’ 나는 뉴욕에 있는 알윈 니콜라이가 세운 무용 학교에 등록했다. 그때까지 쥐고 있었던 호텔경영학을 놓아버리곤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나의 무용인생이다.
나는 무용가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8년 동안 나는 무용가라기보다는 ‘운동선수’로 살았다. 다시 젊음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때의 육체적 고통을 감수하는 무모함을 발휘할 자신은 없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동작들의 연속이었다. 춤을 위해 매일같이 근육을 펴고 다스렸다. ‘근육을 찢었다’는 표현이 꼭 맞았다. 어느 날 아침에는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그대로 꼬꾸라져 화장실까지 기어가기도 했다. 고통은 엄청났지만 ‘몸’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절실히 느끼고 발견할 수 있었던,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경제적으로도 참 어려운 시기였다. 밤이고 낮이고 지친 몸을 질질 끌며 푼돈을 벌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 헤매야 했다.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망치듯 떠나온 유학이었기에 부모님께 손 벌릴 입장이 아니었다. 그러니 나를 먹여 살리는 것은 전적으로 내 몫이었다. 호텔에서 접수를 받는 번듯한 일부터 고양이 밥 먹이는 허드렛일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니콜라이 무용 학교와 컬럼비아대 무용과 석사과정을 거치고, 뉴욕 예술학교에서 안무 공부를 마쳤다. 한눈팔지 않았고 눈코 뜰 새도 없었다. 온몸을 바친 8년의 세월이었다. 방세가 싼 곳만 찾아 예닐곱 차례 이사를 다니는 동안 폐허를 방불케 하는 스탠턴거리의 빈민촌을 한 번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렇게 세월을 보내고 나니 뉴욕 예술학교를 마칠 무렵, 학교 무대에 올린 나의 실험적인 작품을 보고 학장이 “이제 네게는 더 가르칠 것이 없다”라고 했다. 마치 스승으로부터 하산을 허락받은 검객처럼 비장해져서 눈물이 핑 돌았다.
홍신자 무용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