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조로병
한혜경 사회복지학과 교수
100세 시대
1000여 명의 은퇴자들을 만나며 가장 많이 떠올랐던 단어 ‘후회’!
J씨(53세)는 ‘은퇴 후에 가장 후회하는 게 뭔가?’라는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너무 일찍 ‘대박’을 친 거죠”
J씨는 20대 후반에 취직을 했는데, 꿈이 늦어도 마흔 안에 대박을 치는 것이었단다. 그런데 회사만 다녀서는 대박을 못 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J씨는 서른한 살에 회사를 그만둔 후 고속터미널 근처에 조그만 가게를 하나 얻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일에만 매진했다. 스스로 힘든 기준을 세워놓고,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면 다음 단계의 목표를 세우면서 자신을 채찍질했다. 운도 따라줘서 J씨는 만 40세가 되던 해에 직원이 20명 정도 되는 실속 있는 회사의 사장이 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대박’을 친 셈이었고 친구들도 모두 부러워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때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J씨는 대박이란 게 한 번 치면 영원히 계속되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대박이란 게 롤러코스터 같더군요. 올라간 만큼, 빨리 올라갈수록 더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니까요” 사업 규모가 커질수록 고민도 많아졌다. 특히 자금 문제와 직원 관리에 애를 먹었다. 결국 J씨는 총무 겸 자신의 비서인 여직원에게 고민을 털어놓았고, 중요한 일을 모두 그녀와 의논했다.
“당시에는 그녀가 천사인 줄 알았어요. 어쩌면 그렇게 내 마음을 잘 알아줄까, 흠잡을 데 없는 의논 상대라고 생각했죠. 그녀와 동거를 시작하고 본처와 이혼했을 때만 해도 필연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회사 문 닫을 때가 되니까 그 여자가 제일 먼저 떠나더군요. 그때서야 모든 게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죠. 사실 그 여자, 욕하고 싶지도 않아요. 착각한 건 나니까요”
그래도 J씨는 스스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조그만 오피스텔에서 숙식도 해결하면서 혼자 일하고 있다고 했다. 직원이 없으니까 참 평화롭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제야 가장 잘나갈 때가 타락으로 가는 가장 위험한 순간이란 걸 알게 됐어요”
J씨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난 ‘조로병’에 걸렸던 것도 후회해요. 빨리 성공하고 빨리 은퇴하려고 하는 거, 그것도 조로병 아닐까요? 요즘 사람들이 다 그런다지만, 빨리 성공해서 은퇴하면 뭐 합니까? 수명은 자꾸 길어지는데, 대박 나는 것보다 행복해야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나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만약 J씨가 지금 30대이고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그는 한참 만에 대답했다. “얼마 전 TV에서 양학선이라는 체조 선수가 말하더군요. ‘더 높게 날아오를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 착지가 중요하니까’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빨리 대박 쳐서 은퇴하고 그때부터 행복하게 산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겠죠. 대박 치지 않아도 좋으니까 은퇴하지 않고, 오래오래 일하면서 그냥 그 순간순간을 느끼며 살고 싶어요”
얼마 전 나도 대박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날따라 원고도 잘 써지고, 모든 일이 잘 풀려 완벽했다. 오죽하면 자기 전에 ‘매일 오늘 같았으면!’ 하고 중얼거렸을 정도니까. 그런데, 대박은 거기까지였다. 밤늦도록 도대체 잠이 오지 않았던 것. 롤러코스터 정상에 매달려 있는 듯 흥분된 상태로 괴로운 밤을 보냈다. 그때 너무 ‘찐한’ 행복감에는 ‘나쁜 바이러스’가 끼기 쉽다는 것, 그래서 지나치게 행복할 때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소 부족하고 아쉽고, 고달팠던 하루가 우리를 긴장하게 하고 달콤한 잠에 빠지게 한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건 대박이 아니다. 대박이 아니면 실패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작은 성공도 성공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중요한 건 그냥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누가 승리를 말할 수 있으랴, 극복이 전부인 것을!” 릴케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나는 날이었다.
한혜경 사회복지학과 교수
한국보건사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