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원 前 덕양중 교장
중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고 있는 김수진 선생님은 잘난 척하는 남학생들에게 유난히 분노를 느낀다고 호소했다. 명진이라는 학생이 시험문제 풀이를 할 때 “선생님! 다른 방법으로 풀어도 되는데요!”라고 말하면 일단 화부터 난다고 했다. 하지만 교사들은 명진이를 한결같이 공부도 잘하고 무척 적극적인 성실한 학생이라고 평가한다는 것이다. 결국 김수진 선생님은 ‘내 내면에 명진이 같은 태도를 보이는 남자아이들에 대한 선입견이나 왜곡된 신념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집에서도 얼핏 다르지만 비슷한 분노를 느꼈던 적이 있다고 했다. 신혼부부인 김수진 선생님이 어느 날 퇴근해 집으로 가자마자 주방 형광등이 꺼져버렸다. 그녀는 남편에게 형광등을 갈아 달라고 부탁했다. 남편은 형광등을 교체하고 다가오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수진아, 나 형광등 잘 갈지?” 김수진 선생님은 그 말에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아무 대꾸도 않고 가스레인지 쪽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남편이 짓궂게 쫓아오며 다시 말했다. “수진아, 나 형광등 잘 갈지? 나 없으면 우리 집 암흑이지?” 그때 김수진 선생님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세상에 형광등 하나 못 가는 인간도 있어?”
김수진 선생님은 두 살 위 오빠와 세 살 아래 남동생을 둔 삼남매 중 가운데 딸로 성장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집안의 모든 관심은 오빠에게 쏠렸다. 초등학교 입학식 할 때부터 오빠는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등 친지들의 많은 환대를 받았다. 설에 할아버지가 오빠에게는 세뱃돈으로 만 원권 지폐를 주었지만 자신에게는 천 원만 주었던 것도 기억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고모가 오빠에게 가방이나 신발을 사주면 그때마다 오빠는 동생에게 자랑하며 약을 올리곤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김수진 선생이 중간고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엄마가 다가와서 말씀하셨다. “수진아! 오빠가 내년에 대학을 갈 텐데, 우리 집 형편에 너까지 보낼 수는 없으니 너는 공부하지 말고 취업을 해라!” 김수진 선생님은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다. 오빠만 편애하는 부모님과 집안사람들 모두에게 자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집에서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주지 못할 것 같아 비교적 학비 부담이 적은 학교를 목표로 공부한 결과 국립사범대학 과학교육과를 졸업했고, 임용시험을 거쳐 중학교 교사로 발령받았다.
김수진 선생님의 알 수 없는 분노의 근원은 무엇일까? 바로 어린 시절부터 받았던 차별과 치유되지 못한 채 무의식에 남아있던 억울함이 그 원인일 것이다. 명진 학생에게 느꼈던 감정도 실제로 그 아이의 잘난 척 보다 그녀의 무의식에 감춰져 있던 차별로 인해 거절당한 내면아이가 그런 분노를 불러온 것이라 봐야 한다. 남편에게는 아마도 칭찬받고 싶은 내면아이가 있었을 테고, 김수진 선생님에게는 거절당한 내면 아이가 있었을 것이다. 김수진 선생님이 남편과 일으켰던 갈등은 그렇듯 두 내면아이가 부딪치며 빚어진 사건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김수진 선생님과 비슷한, 치유되지 않은 내면아이로부터 시작된 분노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이며, 삶에서 피할 수 없이 꼭 따라오는 요소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분노를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없는 노릇이기에 그 분노를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중요하다. 김수진 선생님은 상담과 치유를 병행한 끝에 분노의 뿌리가 그 남학생이 아니라 부모나 가족에게서 받은 차별과 거절에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자신의 무의식에 남아있던 내면아이가 분노를 유발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꾸준히 치유 과정을 이행했으며 그 결과 이전과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도 한결 여유 있게 치솟는 분노에 대처하게 되었다. 그 뒤로 학생이나 남편에 대한 수용의 폭이 넓어졌으며 주변 사람들과 관계도 좋아졌다.
이준원 前 덕양중 교장
교사마음지원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