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광룡 변호사
서울형사지방법원 배석판사 시절 이른바 운동권들의 활동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 많았다.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의 공소장은 서두에서 항상 북한공산집단은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고 적화통일을 하려는 반국가단체라고 명시해 놓고 운동권이 이에 동조하거나 북한을 이롭게 하는 활동을 하였다고 기재되어 있었다.
보통 변호인들은 북한에 동조하거나 북한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한 적이 없다거나 피고인들이 소속한 단체가 반국가단체가 아니라는 주장을 펴곤 했다. 그런데 어느 변호사는 전대협 관련 사건에서 특이하게도 북한이 반국가단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대한민국을 전복하고 적화통일을 하고자 하는 반국가단체인지 아닌지부터 증명해야 한다며 북한의 총리 연형묵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그 변호사는 마침 남북회담을 위하여 북한의 연형묵 총리가 서울에 들어와 있으니 회담 일정을 참고하여 총리를 증인으로 소환하면 법정에 출석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그에게 과연 북한이 적화통일을 계획하고 있는 단체인가를 직접 물어보자고 했다. 참 기발하면서 어이없는 증인 신청이었다. 남북회담의 북한 대표를 증인으로 채택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도 의문이지만 과연 그가 대한민국의 법원 소환에 응할 것인지, 만에 하나 법정에 와서도 당시 북한의 수령인 김일성의 눈치나, 남한의 운동권 단체들의 활동을 의식하느라 과연 올바른 증언을 할 수 있을지도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재판부는 물론 연형묵에 대한 증인 신청을 채택하지 않았다.
선고기일만 남아 있던 어느 날 그 변호사가 판사실을 방문하여 주심인 나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당시는 형사사건의 변호인이 법정 외에서 재판부에 직접 구두로 변론하기 위하여 별다른 절차 없이 판사실을 출입할 수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변호사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그분이 갑자기 이런 사건에 관여하여 재판을 하고 있는 판사들이 참 안쓰럽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분은 북한은 반국가단체도 아니고, 운동권 단체가 반국가단체를 동조 찬양하는 단체들이 아니라는 점을 나 같은 젊은 판사들이 잘 알고 있음에도 관례나 판례 때문에, 또는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기계적으로 유죄판결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분의 평소 성향을 잘 알던 나는 이분이 뭔가 단단히 잘못 알고 있으니 깨닫도록 일침을 줘야겠다는 생각에 정색하며 일갈했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국가라고 주장하는 지금의 운동권 단체들이 반국가단체 아닙니까? 더 이상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변호사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반문하더니 판사실을 나갔다. 우리 재판부는 당연히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하여 유죄 판결을 하고 상응하는 형을 선고했다.
하광룡 변호사
前 부장판사, 서울대 법과대학 졸
하광룡의 안전한 법률 진행,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