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민 경영컨설턴트
일본을 알자!
일제 강점기 36년간의 굴욕은 일본의 개항과 조선의 쇄국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본만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우리의 문제점을 깊이 느껴보면서 내일의 한일관계도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는 바람에서 개항 전후의 한일 역사를 돌아보는 연재를 시작한다.
개항 직후 학계에서는 ‘천황과 막부의 우두머리인 쇼군과의 관계는 무엇인가?’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천황 우위의 존왕론이 조금씩 뿌리를 내려가는 중이라 250년간 철옹성 같던 막부의 정치 독점 체제가 흔들리고 있었다. 막부는 아래로는 일부 행동파 다이묘로부터, 위로는 교토의 천황 및 공경으로부터 위협받기 시작했다.
1855년 8월 미일화친조약에 의거 미국 영사 타운센드 해리스가 시모다에 부임했다. 해리스는 “쇼군을 알현해야 한다” 주장하면서 통상조약을 강하게 요구했다. 그러자 미국의 압력에 어쩔 줄 모르는 막부를 비판하며 양이론이 거세졌다. 마침 발생한 애로우호 사건(1856년)으로 제2차 아편전쟁을 치르는 청을 들먹이며 해리스는 곧 영국 함대가 일본에 오면 매우 나쁜 조건으로 통상조약을 맺게 될 것이라고 겁을 줬다. 미국과 먼저 통상조약을 맺으면 자신이 영국과도 좋게 알선하겠노라며 밀당이 계속되던 중 1857년, 훗타 마사요시가 개항파인 막부를 이끄는 위치에 올랐다.
훗타는 이제 일본 홀로 쇄국하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해리스의 요구를 받아들이되 신의 한 수를 생각해 냈다. ‘천황의 칙서가 있으면 개항반대파인 존왕양이론자들도 반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으로 250년 만에 처음으로 교토로 향했다.
에도막부 시대 천황과 공경들의 경제적 지원은 전적으로 막부에 의존하고 있었다. ‘당연히 막부의 요구를 천황이 거부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나들이하듯이 교토에서 칙허를 얻어 돌아오겠다는 생각이었다. 훗타의 엄청난 착각이었다. 천황은 교토에서 공경들과 단단히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수백 년 만의 막부 고위층의 교토 방문에 당연히 상당한 수준의 선물과 경제적 지원이 예상되고 있었다. 하지만 ‘훗타의 선물 공세에 한눈팔지 않고 당당하게 천황의 위신을 보여주겠다’고 천황은 자신도 안 받을 테니 신하들에게도 거부하도록 다짐을 받았다.
훗타의 예상과 달리 천황의 칙허는 내려지지 않고 대소란이 벌어졌다. 교토에 전국의 야심가와 행동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교토는 정치적 음모술수와 테러가 가득한 정치도시로 변했다. 결국 훗타는 칙허를 얻지 못한 채 빈손으로 에도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신의 한 수라고 생각했던 천황의 칙허는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결과가 되었다. 에도에 돌아오자 훗타는 로주에서 파면되었다. 반대파가 이이 나오스케를 다이로로 영입했기 때문이다.
박경민 경영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