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재앙은 왜 가을에?
윤기향 경제학과 교수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그 여름은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바람을 들판에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탐스럽게 여물도록 명하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쪽의 날들을 베푸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는 집을 짓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도록 홀로 남을 것입니다.
일어나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뭇잎이 바람에 날리면
가로수 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쉴 새 없이 배회할 것입니다.
마리아 릴케 가을날
지난 100여 년에 걸쳐 가장 고통스러웠던 두 건의 경제적 재앙은 모두 ‘가을날’에 일어났다. 대공황은 1929년 10월에 일어났고, 1988년의 블랙 먼데이도 그해 10월에 불현듯 찾아왔다. 2008년 대침체를 촉발했던 리먼 브라더스의 몰락 역시 9월에 발생했다. 글로벌 경제위기의 여파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던 2011년, 많은 고학력 실업자들이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세계 자본시장의 심장부인 월가에서 시위를 시작한 것도 9월이었다. 가을과 경제적 재앙은 어떤 인과관계라도 있는 것일까? ‘톰 소여의 모험’을 쓴 마크 트웨인은 “10월, 이는 주식투자에 있어서 특히 위험한 달 중 하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경험한 일련의 경제적 재앙들은 어떻게 보면 사람들의 심리적 불안에서 촉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가을은 찬란하게 작열했던 여름의 뒤에 오는 우수의 계절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노래했듯이, 가을날에는 사람들이 허무를 느끼고 고독의 나락으로 빠져드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는 집을 짓지 않을 것이고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도록 그렇게 홀로 남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빠져드는지도 모른다. 경제위기가 주로 가을에 시작된 것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경제 현상에서 사람들의 기대가 큰 역할을 한다면 심리적 불안과 경제위기 사이에 충분한 개연성이 있을 수 있다. 자기실현적 예언에서 보듯이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그러한 기대에 따라 행동할 경우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겨울로 접어드는 길목인 가을이 되면 사람들의 마음이 움츠러들고 우울해지는 경향은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바 있다. 의학적으로는 ‘계절성 정서장애’라고 한다. 이러한 증상은 일조량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근대 경제이론은 개인의 심리적 변화가 의사결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그것이 경기변동에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가르쳐준다. 행동경제학과 인지심리학은 사람들의 심리와 행동 동기가 경제 현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특히 대니얼 카너먼은 인지심리학을 경제적 의사결정에 접목시킨 공로로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그가 연구해 온 인지적 편향, 전망이론, 행복을 다룬 저서 <생각에 관한 생각>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카너먼은 1978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허버트 사이먼과 함께 행동경제학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다. 그들의 이론은 모두 주류경제학을 지배하는 ‘합리성’에 도전하고 있지만, 사이먼은 경제학자 입장에서 행동경제학 이론을 정립한 데 반해 카너만은 심리학자 입장에서 이 문제에 접근했다.
그들은 경제주체들을 비합리적 인간으로 상정하지는 않지만 제한적으로 합리적이라는 전제에 입각하며 때로는 감정적으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음을 인정한다. 감정에 기반한 경제적 결정은 경제위기로 연결될 수 있다. 주류경제학에서도 기대 이론이 경제학에 접목된 지 오래다. 합리적 기대 이론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기존의 주류경제학에서는 합리성에 어긋나는 행동이나 현상을 일종의 특이 현상으로 치부한다. 주류경제학은 당연히 가을의 전설과 경제적 위기 사이의 어떤 연관성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을날 경제위기가 더 많이 발생하는 것이 순전히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제한적 합리성이 가져온 결과인지는 행동경제학의 연구를 기대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경제학사적으로 1929년 가을날에 일어난 경제적 재앙은 새로운 변혁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 대공황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면서 등장한 케인스 경제학은 고전학파로 상징되는 앙시앵 레짐, 즉 구체제에 대한 거부였으며 경제 사조의 새로운 융기였다. 가을의 경제적 재앙이 오히려 ‘가을의 전설’을 만든 것이다.
윤기향 경제학과 교수
서울법대 졸, 와튼스쿨 박사
플로리다애틀랜틱대 종신교수
2001년 ‘올해의 교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