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에서 늘 보는 그림

나의 그림 이야기

김용원 도서출판 삶과꿈 대표

2015년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 안영일 화백 그림이 전시돼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림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야-하’ 소리가 나왔다. 얼마 만인가. 안영일 화백이 1967년에 미국으로 건너갔고, 1982년과 1986년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하고는 소식이 두절됐으니 30년 만의 귀향이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잊혀진 화가였다. 물론 화랑에 그림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지났다.
나는 80년대쯤 현대화랑에서 안영일 화백 그림 두 점을 샀다. 60호 크기의 것으로, 하나는 ‘산타모니카 바다’라는 단색 추상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첼로를 연주하는 사람의 반추상 작품이다. 두고두고 봐도 그림이 좋아 ‘산타모니카 바다’는 우리 집 식탁 맞은편 벽에, ‘첼로를 연주하는 사람’은 사무실 벽에 걸어 놓고 늘 보면서 안영일 화백에 대해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안영일 화백 그림 두 점을 샀다. 60호 단색 추상 ‘산타모니카 바다’는 우리 집 식탁 맞은편 벽에
‘첼로를 연주하는 사람’은 사무실 벽에 걸어 놓고 늘 보면서…

안영일 화백은 일찍부터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는 화가 아버지의 화실에서 네 살 때부터 세잔느 화집을 보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야기, 6세 때 일본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는 이야기, 13세 때 작품이 국전에서 특선으로 뽑혔으나 나중에 나이를 알게 된 심사위원들이 입선으로 낮추었다는 이야기, 20대에 국전 초대작가로 선정된 이야기 등이 모두 그의 천재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또 서울미대 4학년 시절인 1957년에 미국대사관에서 실시한 공모전 때 미국 국무부 심사위원에게 발탁되어 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의 초대전을 갖기도 했다. 미국에서 개인전을 연 최초의 한국인이 된 것이다. 미국인 컬렉터 스탠리 히델라를 만나 1967년 미국으로 가게 되었고, LA에 정착했다. LA 라 시에네가에 있는 재커리 웰러 갤러리 전속화가가 됐기 때문이다.

안영일 – 산타모니카 바다 120x77cm 유화 소위 단색화 그림이 널리 알려지기 2,30년 전 안영일 화백이 미국 LA에서 그린 그림

한동안 그림이 잘 팔려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자신의 은인 같은 컬렉터와 전속화랑 사이에 자신의 작품 판매 건으로 송사가 발생, 10여 년을 끌면서 결과적으로 컬렉터는 패소하고 화랑은 문을 닫았다. 안영일 화백의 표현을 빌리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으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고, 실의에 빠져 그림을 집어치운 채 날마다 LA 인근 바닷가를 찾아 낚시로 소일하게 됐다고 한다.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짙은 안개를 만나 표류한 순간 죽음이 코앞에
마침내 안개 걷혔을 때 진주처럼 수만 가지 색으로 반짝이는 바다가 보여 순간 다시 태어나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보트를 타고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수평선을 향해 나갔다. 이때 앞으로 뻗은 자기 손도 볼 수 없을 정도의 짙은 안개를 만나 표류하게 됐다. 안영일 화백은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순간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것 같은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했고, 깊은 고독감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천지가 온통 하얗게 덮여 좌우를 분간할 수 없는 상태를 체험하게 됐다. 마침내 짙은 안개가 걷혔을 때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전개됐다. 마치 진주로 이루어진 발처럼 수만 가지의 색으로 반짝이는 바다가 보였다. 심장이 기쁨으로 터질듯하고 전신이 흥분으로 떨렸다. 나는 그 순간 다시 태어났다.

안영일 – 첼로 플레이어 22x30cm 유화

그가 2014년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는 이미 80대의 나이였다.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이고, 말하는 게 수월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하루 10시간씩 캔버스 앞에 섰다고 한다. 사다리를 놓고 기어올라가 나이프로 작업하다가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진 적도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안영일 화백의 그림이 우리나라에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LA한국문화원 갤러리와 롱비치미술관 초대전을 시작으로 ‘팜 스프링스 아트페어’, KIAF 등에 초대를 받아 대단한 평가를 받았다. 안영일 화백 작품 60점이 갤러리 세솜에서 전시됐었는데 순식간에 다 팔리기도 했다.
안영일 화백은 이런 말을 남겼다.

80년 동안 그림만 그리며 살았다. 나와 그림은 이제 분리될 수 없는 것, 바로 나 자신이 되었다. 나에게 그림은 사랑이고 기도이며, 나를 열고 타인에게로 나가는, 또한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 같은 것이다. 그림은 내게 있어 존재의 표현이고 이유이며, 소통이고 해방이다.
화가로 살기 때문에 겪는 고통과 어려움도 많았으나 화가가 아니었으면 못 느꼈을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과 감성을 가질 수 있는 것, 그것이 내 삶을 깊게 하고 넓게 해 준 것을 기쁨으로 생각한다.

김용원
서울법대 졸업, 조선일보 편집국장,
대우전자 사장, 도서출판 삶과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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