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없는 말 지우기

이정옥 기자

“한국에서 온 기자를 소개합니다!”
프랑스 기자학교CFPJ 선생님은 나를 동료들에게 소개했다. 모두들 ‘봉주르!’ 하고 인사를 하니 반짝이는 검은 얼굴에 일제히 흰 이가 드러났다. 파리 루브르가 33번지 기자학교에 들어선 나는 교실에 가득한 검은 물결 앞에서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난감했다.
유일한 동양인인 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모로코, 세네갈, 부룬디 등 프랑스 식민지를 겪은 아프리카 기자들이었다. 모국어가 불어인 그들에 비하면 나의 불어 실력은 유아 수준이었다.

처음 ‘필요 없는 말 지우기’ 수업 받아. 그 후 모의 기자회견에서 쉴새없이 질문훈련을

파리 기자학교CFPJ는 기자 양성은 물론 이미 현업에 종사하는 기자들의 재교육을 담당하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언론교육 기관이다. 이곳 출신 기자들은 사회비판 의식이 강하고 자부심이 넘쳤다. 그런 곳에 내가 드디어 들어간 것이다.
처음 모든 기자들은 ‘필요 없는 말 지우기’ 훈련인 ‘샤세’(사냥)라고 하는 수업을 받았다. 그 후 교사가 모의 기자회견을 열어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한 뒤 회견 기사를 쓰는 훈련과 질문 대상자를 정해 놓고 기자들에게 쉬지 않고 묻게 하는 질문 훈련을 했다.
처음에는 빠르게 돌아가는 수업을 따라가느라 온종일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8시간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면 밥도 못 먹고 그대로 쓰러지곤 했다.

TV 기자 수업 때는 연극배우로부터 실습도 받았다. ‘라·레·리·로·뤼’ 혀를 민첩하게 돌리며 정확하게 발음하는 입 운동부터 마이크를 잡고 말하면서 걸어가다가 의자에 앉았다 일어나기, 현장 리포트를 할 때 어떤 동작을 하더라도 흐트러지지 않게 카메라를 쳐다보며 자연스럽게 말하는 훈련도 했다.
하루는 주제를 정하고 각자 쓴 기사를 공개하고 서로 비판하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노조 파업과 관련해 내가 쓴 기사를 읽어주는데 갑자기 모두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ils les ont satisfaits’(회사 측이 노조 측을 만족시켰다.)

‘회사 측이 제시한 조건이 노조를 만족시켰다’는 표현을 줄여서 그렇게 쓴 것인데 왜 웃느냐고 내가 묻자, 그들은 네가 쓴 ‘만족’이라는 표현은 ‘성적인 만족’이라는 의미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외국어는 그 사회에서 관습적으로 쓰이는 미묘한 차이까지 체감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 나는 실감했다.

모의 뉴스 생방송 수업 시간, 메인 앵커와 현장 중계 담당 등 역할을 정해 실제 뉴스처럼 모의 생방송을 했다.
“생방송 5분 전 마감! 마감!”
이 시간이면 실전을 방불케 하는 전쟁이 벌어진다. 프랑스 제3TV 앵커 출신의 교사 질 보부르그는 생방송 시간을 강조하며 기자들을 재촉했다.
다른 기자들에 비해 불어로 기사 쓰는 데 애를 먹는 나로서는 마감 시간에 임박해 기사를 들고 스튜디오로 숨 가쁘게 뛰어가거나, 심지어는 스튜디오를 향해 걸어가면서 기사를 마무리할 때도 있었다.
‘질’이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찡Jeong! 항상 꼴찌는 안 돼!” 그는 내 이름의 ‘정’을 ‘찡’으로 발음하곤 했다.

어느 날 질에게 “1분 30초짜리의 짧은 기자 리포트는 진실을 담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평소에 뉴스 리포트 시간 제약에 늘 회의적이었다. 기사를 짧게 줄이는 작업이 내게는 가장 어려웠다. 그리고 1분여 짧은 방송 내용은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고 치부해 버렸다. 나는 뉴스 리포트보다 길이가 긴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선호했다.
그는 “뉴스 리포트의 ‘함축성’과 ‘직접성’이 주는 묘미에 애정과 열정을 담을 수 있다”고 했다.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자신 있게 답하는 그의 태도에 내 고정관념은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1분 몇초짜리 짧은 리포트는 한계가 있지 않냐” 묻자 그는 한치의 주저도 없이

다큐멘터리가 ‘산문’이라면 1분여 동안의 뉴스 리포트는 한편의 ‘시’처럼 함축적인 진실을 담는 작업이다. 짧은 시간에 사실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예닐곱 문장 정도로 이루어진 리포트 안에서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주는 의미와 파장은 크다. 뉴스 리포트의 한 마디, 한 문장은 긴 산문의 한 문장과 비교할 수 없는 시어처럼 응축된 언어의 산물이다. 방송기자는 이를 생산해 내는 언어의 마술사가 되어야 한다.
현장을 직접 묘사하는 단문 위주의 뉴스 기사의 문장을 경시했던 마음이 밑바닥에서부터 말끔히 사라지자 나는 방송기자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좀 더 당당해지고 의미와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정옥 기자
방송통신심의위원, 前 KBS 파리특파원
코소보전, 이라크전, 예맨인질 납치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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