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도저히 못 참겠다

흰물결이 만난 사람
김종기 푸른나무재단 명예이사장

아드님이 학교폭력으로 힘들어하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나요
한번은 아들 얼굴에 멍이 들고 안경까지 망가졌어요. 깡패한테 맞았다고 했어요. 그 당시 ‘학교폭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서 학교 바깥에서 불량 청소년들에게 맞았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죠. 사실은 선배들한테 두들겨 맞았던 거였어요. 홍콩에서 한인 학교에 다닐 때도 귀국 후에도 친구들과의 갈등을 잘 해결하는 아이였거든요. 저와 아내는 그동안 아들이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어요.
밝고 현명한 아이였는데 한번은 엄마한테 그랬대요, 아빠 다시 해외 근무 안 나가냐고, 이민 안 가냐는 말도 했다는 거예요. 가끔 머리가 아프다거나 배 아프다고 했는데 그게 맞아서 아픈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때 뭔가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아내는 자신이 아이를 잘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해 평생 가슴을 앓고 있죠.

아들이 따로 남기고 간 것이 있었나요
대현이는 자살하기 전에 스스로 모든 것을 말끔히 정리했어요. 사진, 일기장, 수첩… 자기가 좋아하던 옷 같은 건 친구들에게 다 선물하고요. 처음엔 대현이가 떠난 이유가 학교폭력 때문이라는 것도 몰랐어요. 그런데 대현이 삐삐로 친구들이 ‘천사야 잘 가라’ ‘대현아, 너 편히 쉬어라. 네 원수는 내가 갚아줄게’ ‘대현아, 미안해…’ 이런 메시지가 오는 거예요. 그제야 ‘아, 대현이가 선배들한테 계속 맞았구나!’ 알게 된 거죠.

처음엔 몰랐는데 ‘천사야 네 원수는 내가 갚아줄게’ 아들 친구 메시지에 ‘아, 대현이가 맞았구나!’

폭행한 학생들을 만나셨나요
가해 학생 다섯 명을 차례로 만나 반성문을 쓰게 했어요. 그중 우두머리라는 애는 고등학교 2학년인데 한글도 제대로 못써요. 모두에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어요. 겉으로 보기엔 그 아이들을 용서했지만 거의 포기에 가까운 용서였어요. 한 개인의 보복이 또 다른 보복을 낳는 악순환이 될까 봐 두렵기도 했고요. 그보다는 차라리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나는 용서만 받자고 생각을 정리했지요. 그런데 몇 년 후 우두머리라던 그 아이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몰라요.

몇 장 남지 않은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

대현이의 죽음으로 친구들, 선생님들에게 어떤 변화가 생기던가요
대현이와 친한 친구 중에 전교에서 1, 2등을 다투는 모범생이 있었는데 대현이의 자살로 쇼크가 와서 공부를 안 하는 거예요. 그 부모는 그 애에게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노심초사하며 지냈대요. 한번은 교육청에서 교사들 대상으로 강연을 끝내고 나오는데 한 분이 쫓아 오시더니 “제가 대현이 중학교 학생부장이었습니다. 대현이를 잘 돌보았어야 했는데… 항상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삽니다. 지금 이렇게 말 안 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하더군요. 한 사람의 죽음은 여러 사람에게 평생 트라우마가 됩니다.

내 아이가 학교폭력 때문에 결국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셨는데요
아들의 죽음 이후 넋 나간 상태로 회사만 왔다 갔다 하는데 어느 날 딸이 “아빠, 그놈들 나쁜 놈들이야.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어” 그러는 거예요. 가해 학생들이 또 아들 친구 두 명을 무자비하게 폭행해서 하나는 기절하고 하나는 팔이 부러졌다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자마자 “도저히 못 참겠다. 학교폭력의 실태를 알려서 세상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줘야겠다” 결심했습니다.

검사 선배를 찾아가 얘기하니 즉각 조치하겠다고 나섰으나, 정작 피해 학생들의 어머니들이 보복이 두려워 자기 아들들은 대학에 가야 하니 저 혼자 나서라는 겁니다. 당시 한국형사정책 연구위원이던 김준호 박사에게 내 고통을 얘기했어요. 이 문제를 오래 연구해 온 분이라 누구보다 그 심각성을 잘 아는 거예요. “아무도 학교폭력의 실상을 폭로하지 않아 우리 사회가 곯고 있다”면서 용기를 내어 언론에 발표해달래요. 그래서 기자회견을 자청했죠. 아들의 자살이 일간지에 한 면 가득 보도되자마자 난리가 났어요. “내 아들도 가출했다” “내 딸이 행방불명되었다. 대현 군 같은 경우가 아닌지 불안하다”는 문의 전화와 하소연이 폭주했어요.

학교폭력방지 국회청원을 위해 47만 시민들의 서명을

1995년 9월 그분들을 모아 “학교에만 의지하지 말고 우리 부모들 스스로가 자녀들을 잘 지키자!”는 선언문을 낭독했습니다. 그렇게 임의로 시민단체가 만들어지고, 두 달 후 ‘청소년폭력예방재단’으로 출범한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외롭고 힘든 길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당시 제가 기업체 임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회사 재산을 편법으로 빼돌리려고 재단을 만드는 게 아니냐는 황당한 얘기도 들었죠. 더 기막힌 건 출범식이 3일 앞으로 다가오도록 가장 중요한 설립인가가 나질 않는 거예요.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서 제가 직접 알아보니 ‘학교폭력’이란 명칭 때문에 인가해 줄 수 없다는 거예요.

원래 재단 명칭을 ‘학교폭력예방재단’으로 신청했는데 ‘학교폭력’이란 말이 학교 이미지를 안 좋게 한다는 것, 학교에서 겪는 폭력은 극히 일부일 뿐 학교 밖 불량 청소년의 문제라는 거죠. 그때 담당자가 스치듯 “‘학교폭력’이라는 말 대신 ‘청소년폭력’이라고 바꾸면 될 수도 있는데…” 하는 거예요. 출범식에 맞춰 많은 준비를 했는데,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출범식 전날 오후, 시청사 건물 한 켠에서 ‘학교’를 두 줄로 긋고 ‘청소년’으로 수정하고 서명했어요. 그랬더니 1시간 후 인가증이 나오더군요. 그 뒤로도 8년간 교육 당국은 학교폭력이란 용어를 거부해 왔습니다.

학교폭력 당해 기절하고 팔 부러져도 어머니들 보복 두려워 폭로 못해
그러다 대현이 자살 보도되자…

교육부가 학교폭력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인정한 것은 2004년 ‘학폭법’ 제정 과정에서예요. 청소년폭력예방재단현 푸른나무재단이 ‘아이들은 계속 가출하고 자살하고 문제가 심각한데, 공무원들이 복지부동이어서는 끝이 없겠다.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겠다’ 작정하고 1년 6개월에 걸쳐 주말마다 거리로 나가 47만 명의 서명을 받아서 국회 청원을 했어요. 그래서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이 논의되기 시작했고, 저희 청예단이 출범한 지 무려 9년 만인 2004년에야 비로소 교육부 공문이나 자료에 ‘학교폭력’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게 된 겁니다.

그렇게 힘든데도 버텨내신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저는 지금도 아들 사진을 지갑 속에 가지고 다녀요. 힘들 때나 아주 좋은 일이 생길 때도 한 번씩 꺼내 보며 말하지요. “대현아, 미안하다! 힘을 다오!” 그렇게 힘들게 10년을 참고 버틴 힘은 대현이와의 약속을 제가 숙명으로 받아들인 점도 있지만, 시민들과 언론들이 우리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큰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세상에 정의가 살아있다는 증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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