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숙 수녀
프랑스에 도착해서 맨 처음 리옹시 변두리 ‘라 뒤셰르’의 아파트 단지에 살게 되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나라들이 독립한 후 본국으로 돌아온 프랑스인들을 위해 정부에서 지은 저렴한 임대 아파트다. 많은 이민자들도 살고 있는 지역이었다. 가난한 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우리 수녀회도 이곳에 집을 얻어 여섯 자매들이 함께 살았다.
나는 프랑스에 갓 도착해 리옹 교구 학교에 다녔다. 학교 사목이나 본당 일, 공부를 하면서 가난한 동네의 주민으로 더불어 살아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인사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어디 누가 사는지 알게 되고 집으로 찾아가기도 했다. 베이비시터가 못 오는 날에는 맞벌이 부부의 아기도 봐주고 우리가 집을 비울 때면 열쇠를 맡기고 화분에 물 주기를 부탁하기도 했다. 국적과 종교는 다르지만 가끔 파티를 하느라 한자리에 모였다.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교 신자들이 매달 모임을 갖고 모로코 출신 아주머니가 끓여주는 국을 함께 먹기도 했다.
우범지대라 시카고라고도 불렸던 이 아파트 단지에는 늘상 사건이 발생했다. 버스 정류장의 유리창은 거의 항상 깨져 있었다. 누군가 왕창 부숴 놓으면 새로 유리를 끼우고, 또다시 왕창 부서뜨리고 새로 끼우고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파트 입구의 우편함이 전부 불타기도 했다. 서로 싸우는 장면은 일상이었다. 한번은 경찰에 연행된 사람이 일주일 만에 무죄 석방된 후 자살한 적이 있었다. 놀라고 마음 아팠지만 우리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뿐이었다. 이러한 어두운 환경 속에서도 소소한 아름다움은 있었다.
어느 날 시골에 있는 수녀원에 다녀오면서 얻어온 과일과 채소 등 크고 작은 짐들을 잔뜩 들고 왔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또 고장 난 게 아닌가. 우리 아파트는 14층! 이를 어쩌나 하고 있는데, 외출하러 내려왔던 2층 아프리카 아가씨가 짐 몇 개를 번쩍 들더니 계단을 뛰어갔다. 힘을 얻은 우리도 용감하게 짐을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가쁜 숨을 내쉬며 집에 도착해 보니 문고리에 비닐봉지가 걸려 있었다. 집에서 만든 케이크였다. 이렇게 누가 갖다 놓았는지도 모르는 선물을 받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하느님만이 아실 그 은인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가 받은 것을 또 다른 이웃과 나눴다.엘리베이터는 오랫동안 고쳐지지 않은 채로 있었다. 15층 사는 노부부가 걱정이 되어 올라가 보았더니, 이미 이웃들이 매일 빵도 사다 주고 우편물도 찾아다 준다는 것이었다.
아파트 6층에는 튀니지 출신 할아버지 가족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이 할아버지가 사색이 되어 온 아파트를 돌아다녔다. 중요한 서류를 분실했다는 것이다. 꼬박 이틀 동안 온 데를 다 뒤지고 돌아다닌 끝에 마침내 쓰레기 처리장에서 서류를 찾아냈다. 우리도 함께 기뻐했다. 다음날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여니 할아버지가 케이크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잃어버린 서류를 찾아 너무나 감사한데, 감사드릴 하느님이 바로 앞에 계시지 않아 대신 ‘하느님의 연인들’에게 감사를 드리러 온 것이라고! 그곳을 떠난 지 거의 30년이 되어 가지만, 그 시절 이웃살이를 잊을 수가 없다.
원진숙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