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감

김옥순

사업 실패로 남편은 사지가 마비되고 식물인간이 되었다. 수술조차 할 수 없는 뇌간 출혈이었다. 게다가 집이 경매에 들어갔다고 연락이 왔다. 남편이 친구의 돈을 오랫동안 갚지 않았던 모양이다.
집을 팔아서 빚을 갚아야 손해를 덜 보는 형편이라 경매를 취소해달라고 사정했지만 친구는 냉랭했다. 그가 몇 번이나 남편을 찾아갔는데 피하기만 하고 전화도 받지 않아 괘씸하고 화가 났다고 했다.

은행이 1순위라 그에게 돌아갈 것도 없었지만, 신의를 저버린 남편에게 쏜 화살이었다. 뒤돌아선 그가 야속하고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 후 일 년이 흘렀다. 어느 날 그에게서 좀 만날 수 있느냐고 전화가 왔다. 눈앞에 시퍼런 아지랑이가 아롱거리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걱정이 태산 같았다.
병원으로 부부가 찾아왔다. 친구가 사지 마비된 남편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친구야,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내가 자네를 이렇게 만들었네” 남편은 눈을 크게 뜨고 눈물을 주룩 흘렸다.

그의 부인이 울먹이며 어렵던 신혼 시절 남편이 자주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첫아이를 낳았을 때도 산모의 젖이 잘 나와야 한다고 돼지족발을 가져다준 것을 지금도 잊지 못한단다.
병원 식당에서도 친구는 눈물을 흘리며 남편 이야기를 했다. 몇 년 전 남편에게 자동차 사고가 있었다. 가해자는 무보험 운전자였는데 졸음운전으로 우리 차를 폐차될 지경으로 망가뜨렸다.

남편이 친구 돈을 갚지 않던 중 사업 실패로 식물인간 되자, 우리 집이 경매에 들어가
경매를 취소해달라고 사정했지만 친구는 남편이 피하기만 해서 괘씸하다고 해
그 후 일 년이 흐른 어느 날 그에게서 좀 만날 수 있느냐는 전화가…

형편이 어려우니 신고하지 말고 합의해달라며 사정하기에 연락처만 받았는데 일 년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주민등록번호를 추적해서 운전자를 찾아갔는데 사는 형편이 가히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다. 합의금은커녕 쌀 한 포대 사주고 돈 이십만 원까지 주고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의리 있고 인정 많은 친구였는데 자기가 너무 나빴다며 자책했다.

그의 아내가 빨간색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크리스마스 때 어려운 이웃에게 주려고 생활비를 알뜰살뜰 쪼개서 모아둔 돈이라고 했다. 못 받는다고 손사래를 쳤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그가 집사람은 돈 이야기를 모르고 있다며 아무 소리 말고 받으라고 눈짓을 했다. 나는 얼떨결에 봉투를 받았다. 고개를 숙이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돈을 준 고마움보다 집사람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더 감동했다.
오랜 세월 남편과 친구의 우정은 끈끈했다. 보이지 않으면 서로 보고 싶어 했고,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천만 원이라는 돈을 선뜻 빌려준 친구에게 배신감을 준 남편의 마음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친구 또한 죽음을 앞둔 남편의 마음에 상처를 준 일이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친구는 중환자실에 있는 남편을 찾아갔다고 했다. 지난 일은 잊고 편안히 잘 가라는 친구의 말에 남편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단다. 서로 마음을 풀고 용서를 청한 얼마 뒤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내게는 남편을 위한 숙제가 남아있었다. 나는 남편이 빚 없이 홀가분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기를 바랐다. 장례를 마친 후 이백만 원을 봉투에 넣어서 아들을 데리고 친구를 찾아갔다. 그의 앞에 봉투를 내어놓고 머리를 숙였다. 염치없지만 남은 돈은 일 년에 백만 원씩 나누어 갚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세상을 뜬 남편과의 일이었을 뿐 나와는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그 고마움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내 마음의 빚도 청산해야겠기에 받아달라며 애원했다. 그는 마지못해 뜻이 정 그렇다면 받겠다고 하더니 아들의 손에 백만 원을 집어 주었다. 가슴이 떨렸다. 오랫동안 나를 짓누르던 마음의 빚까지 탕감받는 순간이었다.
마음을 다해 인사하고 헤어졌다. 야속하다 원망했던 못난 내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갔다. 나는 아들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이렇게 사는 것이란다”
언젠가 나에게도 누군가의 빚을 탕감해 줄 날이 오겠지.

김옥순

spot_img

문화의 시대 우리는 문화적인가!

발행인 윤학 장인어른은 가끔 할아버지를 회상하곤 했다. 국민학교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가끔 찾아오셨었다는 이야기며, 갓을 쓰고 장에 다녀오시다가 멀리 고갯길에서 무언가...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beautiful)

데스 브로피 Des Brophy 화가 가난 속에서도 어머니는 음악이 있으면 우리와 함께 항상 춤을 췄죠. 제 그림 중에 춤추는...

왕따 인생

고학찬 전 예술의 전당 사장 “딴따라과 나온 네가 어떻게 PD 시험을…”내 인생은 왕따 인생이에요. 중학교는 제주도에서 다니고 고등학교를 서울 사는...

권력버블의 정점

발행인 윤학 일본 사람들이 벼락부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자고 나면 오르는 부동산이 금세 팔리고 은행 융자로 더 비싼 땅을 사면...

베트남 통일, 나의 시련

뉴엔 밴동 사업가 나는 남베트남 지역에서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조상들은 모두 가톨릭 신자였고 나도 태어난 지 며칠 후 세례를 받았다.내...

관련 기사

이전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