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근혜
대학 시절, 수강과목 중에 ‘유명인사 취재하기’라는 리포트 과제가 주어졌다. 당시 내가 몹시도 열광하며 좋아했던 서태지를 만나볼까도 생각했지만 한국 가톨릭 내의 최고 어른인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자고 결정을 내렸다. 한국 최초의 성당인 명동성당에 대한 유래도 써내기 위해서 카메라를 들고 길을 나섰다.
성당에 도착하여 언덕길을 오르는데 차가 한 대 지나갔다. 차 안에 빨간 빵떡모자를 쓰신 분이 앉아 계셨다. 모자와 제의의 색이 화려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취재하고자 하는 바로 그분! 김수환 추기경이 외출을 하시는 거였다. 순간 입구가 하나이므로 몇 시간 기다렸다가 들어오는 차를 막아서서 취재에 응해달라고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분을 곧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무작정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추운 날씨에 손과 발은 꽁꽁 얼고 두 볼도 빨갛게 감각을 잃어갔다. 화장실도 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추기경님 차가 지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만 동동 구르며 내리 6시간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취재 때 쓸 질문들을 원고지에 미리 계획해 두었다.
마침내 추기경님의 차가 입구로 들어섰다. 나는 용감하게 두 팔로 차를 막아섰다. 놀란 그분들의 표정에 나도 조금은 민망했다. 차 문을 열고 비서 신부님이 내리시더니 “무례하게 이게 무슨 짓이냐”고 꾸짖으셨다. 나를 소개하고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약속 없이 무작정 찾아오기는 하였으나 6시간을 기다렸으니 취재에 응해달라” 당당하게 말씀드렸다.
그러나 비서 신부는 추기경님은 나 같은 학생을 만나 취재에 응해줄 만큼 한가한 동네어른이 아니라고 따끔하게 충고했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추기경님의 스케줄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6시간에 대한 기다림에 화가 났고 보상받고 싶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으로 이해되지 않아서 비서 신부께 이렇게 따졌다.
“예수님은 창녀도 만나주신 너그러운 분이셨는데, 김수환 추기경님이 뭐 그리도 대단하세요? 평범한 대학생의 10분 만남조차도 거부하시니 화가 나고 가톨릭에 회의를 느낍니다” 비서 신부님은 나의 말에 많이 놀란 듯했지만 반동의 하시고 계속 나를 달랬다. “취재를 거부하신다면 제 질문지라도 작성해 주세요”라고 작은 조건을 붙였다. 비서 신부는 나의 억지스러울 정도의 고집 때문에 원고를 받아들고 “너무 기대는 하지 말라”며 전화번호를 물으셨다. 아무것도 성사되지 않은 나는 멍하니 철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허무하고 약이 올랐다.
잠시 후 비서 신부가 나오셨다. “6시간을 기다린 손님을 비서 신부 마음대로 돌려보냈다며 추기경님께 혼쭐이 났다”며 돌아오는 토요일에 초대를 해주신다는 것이었다! 토요일 만남이 이루어진 날, 추기경님께 그날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드렸다. “학생의 당돌함과 용기에 웃음이 절로 난다”며 추기경은 너그럽게 대해주셨다. 한국교회 최고의 어른이시지만 소박한 웃음과 천사 같은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첫 번째 질문은 “요즘 어떤 기도를 하시나요?”였다. “가장 시급한 것은 우리 자신의 복음화이고 다음은 우리나라 통일을 위한 기도지요. 그리고 백혈병에 걸린 한 소녀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라고 응답해 주셨다. 마지막엔 비서 언니가 사진 촬영도 해주었다. 김수환 추기경님과 함께한 사진은 내 젊은 날의 추억이 되어 고스란히 내 기억 속에 존재한다. 김수환 추기경님 또한 ‘엉뚱한 학생’ 사진 한 장을 사진첩에 넣어두었으리라.
나는 ‘아주 작은 곳까지 신경 쓰는 김수환 추기경’이라는 제목을 붙여 리포트를 제출했다. 그 과목은 당연 에이플러스를 받았다. 나의 무지함과 당돌함이 합해져서 대형 사고를 친 것이다. 교수님은 기자 생활도 잘할 것 같다며 놀리시고는 고생 많았다고 격려해 주셨다. 추기경님은 그다음 해에 새해 카드까지 보내주셨다. “차를 가로막은 당돌한 학생을 내가 어찌 잊겠어. 새해에 주님의 은총 속에 건강하여라”는 축복의 메시지를 볼 때마다 감사한 마음이 솟아오른다.
우근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