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손정호

그날은 잔칫날이었다. 1-2인 사촌 시아주버님의 칠순 잔치가 한 호텔에서 열렸다. ‘1-2’라는 암호 같은 숫자는 첫째 댁 둘째 아드님이라는 뜻이다. 시아버님 형제가 여섯 분이나 되다 보니 그 자손들을 지칭할 때 편의상 정한 집안의 ID 번호이다. 우리 아들 베드로는 셋째 집안 장남의 장남이니 3-1-1이 되는 것이다. 그날 널찍한 홀엔 여러 개의 테이블이 놓이고 직계가족, 친가, 외가, 처가, 친구분들 이런 식으로 모여 앉았다. 그날따라 더 젊어 보이는 단상의 주인공을 향한 축하의 정이 넘쳐나고 “70 노옹이 아직도 현역이시니 정말 대단하시다, 백수白壽는 너끈히 누리시겠다”는 덕담이 오가는 화기애애한 자리였다.

사촌들은 당연히 자기들끼리 앉았다. 이미 부부동반으로 성지순례도 다녀오고 골프여행도 같이 다녀온 적이 있어 남다른 우애가 있는 사촌들이니만치 서로 할 얘기도 많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만 분위기가 썰렁해지는 일이 생겼다. 먼저 2-3이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빨갱이, 간첩이 민주화 인사라니 그게 말이 됩니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남파간첩, 빨치산 출신의 비전향 장기수들의 죽음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한 것을 두고 하는 얘기였다. 요사인 어딜 가나 대체로 이렇다. 5060들은 나라가 좌향좌했다고 열을 올린다. “뭘 모르면 가만히 있어” 2-2가 동생의 말을 잘랐다. 그러자 신세대들 표현을 빌리면 ‘뚜껑이 열리는지’ 3-1이 한마디 할 태세를 보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집안의 명가수이자 여흥담당인 조카사위가 기타를 딩딩치며 다가와 그에게 노래를 청한 것. 위기는 피했지만 생각의 차이는 확연히 드러났다. 사이좋은 형제들이 각을 세우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 나는 내심 놀랐다. 정치가 뭐길래…

빨갱이가 민주화인사라니 말이 돼?” 잔칫날 썰렁해지려던 순간 조카사위 기타를 딩딩치며

문득 먼 옛날에 읽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생각났다. 내 기억의 심연에서 수면 위로 떠오르는 대목이 있었다. 소설 속의 그날도 잔칫날이었으리라! 크리스마스 만찬 장면. 아버지 디달러스 씨는 연미복까지 차려입었다. 벽난로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샹들리에 아래엔 멋있는 크리스마스 식탁, 훌륭한 칠면조요리에 달콤한 후식, 온 집안에 흐르는 흐뭇하고 즐거운 기분. 방학을 맞아 설레이는 가슴으로 기숙학교에서 돌아온 스티븐이 생애 처음으로 참석하는 어른들과의 성탄절 만찬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종조부… 모두가 모였다. 다 같이 기분 좋게 먹고 마시다가 그만… 피했어야 하는 화제 ‘이념과 종교 얘기’로 논쟁이 시작되었고 드디어 “꽝” 한 사람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었다. 지금도 생각난다. 격렬하게 싸우는 그들이 전혀 이해가 안 되고 아주 어리석게만 여겨졌던 것이. 그렇게 편을 갈라 싸워서 아일랜드인들이 얻은 건 무얼까? 그 후 그들은 어떤 행로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으며 지금의 그들의 위상은 어떠한가?

잔치 다음 날 서가에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찾아내어 예의 그 싸움 장면을 펼쳤다. “글쎄, 정말이지 진저리나서 못 참겠어요. 일 년 중 단 하루도 이 진저리나는 싸움을 면할 수가 없으니 말예요!” 스티븐의 어머니 디달러스 부인이 소리쳤고 찰스 할아버지도 개탄했다. “자, 이제 그만, 그만! 누구든지 이렇게 성을 내거나 심한 말을 쓰지 않고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의견을 말할 수 없을까?” 아주 험악한 분위기로 치달았었다. 당시 아일랜드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이성을 잃고 얼마나 자주 격렬하게 싸웠는지를 짐작게 한다.

“정말이지 진저리나서 못 참겠어요. 일 년 중 단 하루도 이 싸움을 면할 수가 없으니 말예요!”

우린 아직 그 지경엔 이르지 않아서 안도의 숨을 쉴 만한가? 학습된 논리로 무장하고 치열하게 논쟁해 보자는 세력과 개혁도 필요하면 해야 되지만 매사를 이분법적 사고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고 제동을 거는 세력 간 갈등의 골이 깊어만 가는 게 불안하기 짝이 없다. 내 또래는 “뭉치면 살고 헤치면 죽는다”는 표어에 공감하며 자랐다. 그 말은 당대의 진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그리 말하지 않는다. 단지 독재자의 어록 속에 박제되어 있을 뿐. 바야흐로 중구난방의 때라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까 하노라” 하고 입을 다물지만 나는 외치고 싶다. ‘뭉쳐야 산다’고.

예수는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고 어느 동네나 집안도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지탱하지 못한다”(마태 12,25) 그러니 ‘서로 사랑하여라’가 해답인 것이다. 네 편, 내 편 가르지 말고 싸우지 말자는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야 한다. 더 밝은 미래를 위해 화합과 일치를 이루어야 할 역사적 사명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가 그 어느 때보다 더 가슴을 친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손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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