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규 시인

아흔 셋이 되셨는데 어린 시절 기억나는 장면이 있으세요?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교회가 있었어요. 할머니가 그 교회를 다니셨는데 어머니도 할머니 따라 교회에 다녔죠. 쌀이 귀한 때였는데도 교회 갈 때는 쌀을 바가지로 퍼가지고 갔던 기억이 나요. 2.5킬로나 되는 먼 거리를 어머니는 쌀을 안고 할머니는 나를 업고 가는 거예요.
설날 전날 밤, 어머니가 머리맡에 새 옷을 놓아주러 들어오셨어요. 그런 옷을 ‘조선옷’이라고 했는데 조끼랑 종이로 접은 것 같은 옛날 바지예요. 그 당시에는 설날이나 추석날 아니면 정말 걸레보다 조금 나은 옷을 입고 다녔거든요.웃음
새 옷을 머리맡에 놓아주시면서 교회에서 배워온 노래를 불러주시는 거예요. 어머니가 하는 노래를 나도 더듬더듬 따라 불렀죠. 그날 아들하고 엄마하고 처음 노래를 같이 불러 봤어요. 그때 배운 노래와 장면이 여지껏 잊혀지지가 않아요.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 형제
반짝반짝 정답게 지내이더니
웬일인지 별 하나 보이지 않고
남은 별이 둘이서 눈물 흘린다
어렸을 때는 이게 무슨 뜻인지 생각도 않고 불렀는데 크면서 의미를 곱씹게 되잖아요. “웬일인지 별 하나 보이지 않고… 남은 별들이 눈물 흘린다” 이게 인간의 이별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노래하는 거 같더라고요. 인간의 짧은 운명을 이렇게 함축적인 글에 담은 것이 참 놀라워요. 나중에 알고 보니 방정환 시인의 ‘형제별’이라는 시에 노랫가락을 붙인 거였어요.
어머님이 가르쳐준 노래를 부르며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을 표현해낼 수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느꼈던 거 같아요.
교회 갈 때 어머니는 바가지로 푼 쌀을 안고 할머니는 나를 업고 2.5킬로 거리를 어머니가 교회에서 배워온 노래 부르면 나도 더듬더듬 따라 불러
저도 아이들 재울 때 “빨리 자라” 채근만 하지 말고 노래를 불러줘야겠네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사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보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훨씬 깊어요. 나를 낳았을 때 아버지가 스물다섯 살도 채 안 된 나이인 데다 공무원으로 한창 열심히 일할 때니깐 국민학교 입학 때도 할아버지가 나를 데려갔어요.
여덟 살 무렵, 비가 쏟아지던 날 흰 두루마기 입고 지팡이 짚은 할아버지를 쫄래쫄래 따라갔던 기억이 나요. 그날 태인 국민학교에 입학하러 간 거였어요.
학교에서 일본말로 공부했던 시절이라 일본 노래를 배웠겠네요
입학하자마자 일본말부터 서투르게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 당시는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였을 때여서 1학년 때부터 죽~ 해방이 된 6학년 때까지 한글은 한 자도 배우지 못했어요.
국가도 일본 국기를 세우면서 ‘시라치니 아까꾸 히노마루 소메떼 아아 우쯔쿠시야’ 일본말로 불렀어요. 그게 뭔 얘기냐 하면 ‘저 흰 바탕에 동그랗고 빨간 것~ 아~ 참 아름답구나’ 일장기를 설명하는 노래인 거죠. 그런 것부터 배워나간 거예요.
근데 6학년 때 해방이 되면서 우리나라의 비교적 선구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같은 곳에서 ‘가갸 거겨 기역 니은 디귿 리을 아야 어여’를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마침 그 동네에 중학교까지 졸업한 사람 중에 교회에 다니던 사람이 있었나 봐요. 그분이 보충수업 선생으로 우리 학교에 처음 오게 됐어요. 일본 선생들이나 일본말로 교육시키던 한국 선생들 대신으로… 그 보충선생님이 오셔서 처음 부른 노래가 뭔 줄 아세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얼마나 그리웠겠어요. 나라도 다 뺏기고. 그게 내가 처음 정식으로 학교에서 배워 본 우리말 노래였어요.
해방이 되니깐 6학년 졸업할 때 즈음 일본 책을 다 버리고 태우는 거예요. 근데 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