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석 작가
아이들이 “저도 이거 만들고 싶어요” 열광한다. 선생님들도 “제가 해도 재밌어요” 감탄한다. 내가 만든 구슬트랙 때문이다. 구슬트랙은 구슬을 굴려 내려보내는 놀이다. 미술 학원 부원장을 맡고 처음 만든 작품이 구슬트랙이었다. 나는 그 구슬트랙을 ‘엘사의 얼음궁전’이라고 불렀다. 다른 선생님들이 만든 구슬트랙은 고장 나면 두세 달 만에 새것으로 대체됐지만 나는 아이들의 반응을 보며 계속 그것을 고치고 고쳤다.
그런데 어느 날, 구슬을 서로 먼저 굴리겠다고 다투던 아이가 넘어지면서 우지끈! 8년을 함께 한 구슬트랙이 부서졌다. 예전 같으면 다시 고쳤을 것이다. 하지만 내 인내심의 한계가 느껴졌다. 새로운 일과 휴식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9년 가까이 일하던 미술학원을 그만두고 1년 2개월 동안 평택에서 숙식 노가다를 했다. 의외로 재미있었지만 어느 순간 꿈에서도 가끔 즐겁게 수업하는 내가 보였다. 구슬트랙을 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스쳐 지나갔다.
그즈음 책방 대표가 일요일 수업을 제안해 왔다. 주 6일은 노가다를 하고 일요일은 미술수업을 했다. 휴일에 힘들었지만 신기하게도 오히려 아이들과의 수업에서 에너지를 얻었다. 나중에 대표가 아예 평일 이틀을 더 비워준다며 수업을 마음껏 해보라고 했다. 고민 끝에 노가다를 그만두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아이들 모으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일요일은 인원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평일에 막상 수업을 시작하자 수강생이 항상 부족했다.
원생을 어떻게 모집할 것인가? 학생들의 왕래가 많은 황금자리에서 포스터로, 모니터로 광고해도 처음엔 눈길을 끌겠지만 익숙해지면 눈여겨보지 않게 된다. ‘내가 학원에서 뭘 했지?’ 순간 구슬트랙이 떠올랐다. ‘엘사의 얼음궁전!’ 만약 광고 포스터에 손잡이가 있고, 그 손잡이를 돌리니 글자 색이 변하고 포스터 모양이 변한다면? 구슬트랙 간판은 최고의 효과를 발휘할 것이었다.
처음에는 막막했지만 처음 구슬트랙을 만들면서 느꼈던 즐거움, 아이들의 입맛에 맞게 수없이 고치면서 생긴 노하우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아이들이 내 구슬트랙을 유난히 좋아했던 이유가 뭘까? 고민하며 만들다 보니 몇 시간 만에 하나가 뚝딱 나왔다. 책방 대표와 주변에서는 걱정이 많았다. 골판지 작품이 과연 비바람을 견딜 수 있을지, 혹시나 학생들이 장난삼아 부숴버리면 어떡하지… 일단 방수 처리를 해서 비바람에 젖지 않게 했다.
반년이 지난 지금, 구슬트랙은 여전히 건재하다! 한번은 심한 강풍으로 구슬트랙이 거의 무너지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대표는 튼튼하게 다시 만드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내가 지난 8년간 하나의 구슬트랙을 수리하면서 얻은 철학이 있었다. “진짜 아름다움은 내 것을 최선을 다해 고쳐나가는 데서 나온다” 그 과정, 결과물은 나만의 이력이다. 누구도 복제할 수 없는 나만의 개성이자 작품이다. 구슬트랙을 PVC파이프로 기둥을 만들고 고정하자 더 튼튼해졌다. 360도 회전 트랙도 추가하고 두 명이 동시에 굴릴 수 있도록 더블 트랙도 만들었다. 아이 둘이 함께 굴리면 더욱 신나지 않겠는가.
한번은 창밖에서 “우와! 꺄!” 비명 소리가 들려서 나가보았다. 한 아이가 구슬을 굴리며 실로폰 소리를 즐기고 있었다. 그즈음 기증받은 실로폰으로 구슬이 굴러갈 때 소리가 나게 했었다. 한 학생이 더 높은 곳에서 구슬을 굴려주었더니 아이는 더 좋다며 꺄르르 소리를 질렀다. 신기하게도 그 아이의 웃음소리가 세이렌의 노랫소리처럼 다른 아이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이들에게 “이런 거 만들고 싶으면 엄마한테 이야기해” 하며 미리 출력해 둔 전단지를 나눠주었다. 덕분에 수강생을 꽤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첫날에는 구슬이 사라지면 어쩌지 걱정했다. 걱정한 대로 다음날 구슬이 하나도 없어 꽤나 실망했는데 고개를 숙이자 구슬들이 구석 여기저기에 있었다. 한 아이어머니는 왕구슬을 포함해서 구슬 세 알을 건네주시기도 했다. 아이가 구슬트랙을 하려고 하면 가끔 구슬이 없을 때가 있어서 구슬을 기증하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차츰차츰 구슬트랙에 애정을 갖는 학생들이 늘어나 이제는 다른 지역에서도 구슬트랙 만들기 수업을 하고 있다. 이번 해에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도 구슬트랙 수업을 진행했다. 아이들이 미술학원에 와서 즐겁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 요즘 미디어에 노출된 아이들이 스스로 놀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했을 뿐인데 내 사업으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꿈만 같다.
고용석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