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민 오민코셉스 뷰티아카데미 대표

무대 뒤의 인생
나는 20년간 무대 뒤에서 4000번이 넘는 패션쇼 아트디렉터로 일해왔습니다. 매년 ‘서울 컬렉션’ 출연자들의 헤어디자인과 메이크업을 맡아 했고, 덕분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와 슈퍼모델대회 심사위원도 했지요. SBS TV 드라마 ‘패션 70s’에 출연했던 배우들의 헤어디자인과 메이크업도 내 작품이에요.
시상식 때 열리는 패션쇼와 앙드레김, 이상봉 등 유명 디자이너들의 화려한 패션쇼의 백스테이지에는 늘 내가 있었어요.
Vogue, ELLE 같은 세계적인 패션잡지 화보 촬영 현장에도 빠지지 않았지요.
헤어디자이너를 하면서도 늘 새로운 감각으로 과감한 시도를 하다 보니 아트디렉터로까지 영역을 넓히게 됐지요. 미용실에만 머물던 영역을 패션 무대에까지 확대한 개척자가 된 거예요. 어떤 이들은 이런 나를 ‘한국 패션과 미용계의 살아있는 역사’라고도 해요.웃음
많을 때는 1년에 3백 개의 패션쇼를 해요. 그 많은 쇼를 하지만 우리는 두 번이란 게 없어요. 잘라진 머리를 다시 되돌릴 수 있나요? 쇼도 마찬가지죠. 내가 실수했다고 다시 하자고 할 수는 없잖아요.
나는 그 긴장이 좋아요. 쇼를 할 때는 다 잊고 그냥 완전히 그 쇼에 빠져버리죠. 음악 터지고 조명 터지면 ‘아 이제 시작이다’ 나는 그걸 즐기며 사는 것 같아요.
멋진 모델이 걸어 나오는 것을 보면 내가 걸어 나가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머리카락이 쭈뼛쭈뼛하지요.웃음
음악과 조명 터지면 ‘아 이제 시작이다’ 멋진 모델이 걸어 나오는 것을 보면 내가 워킹하는 것처럼…
나 같은 무대 뒤 인생은 그 즐거움 때문에 살아가요. 스타를 만들어내는 기쁨! 비록 제가 스타는 아니지만 그게 얼마나 행복한데요. 그래서 마지막 끝날 때가 되면 무대에 나갔다 온 모델들보다 뒤에 있던 우리가 더 지쳐요. 모델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수고하셨습니다” 하며 껴안아 줄 때 ‘아! 잘 끝났구나!’ 무척 행복해요.
화려한 지금의 모습만 보고 다들 내가 서울 토박이인 줄 아는데 사실 나는 1961년, 경남 거창군 마리면에서 평범한 농부의 일곱째로 태어났어요.
옛날에 빨치산이 출몰하던 산골이 내 고향입니다.
아버지 말씀이, 밤에는 빨치산의 등쌀에 쌀을 지고 산으로 올라가고, 낮에는 국군이 와서 괴롭혔대요. 우리 동네 아래가 거창 양민학살사건이 일어난 그 현장이에요.
너무너무 산골짜기라서 옛날에 김천에서 생선을 사서 거창까지 넘어오면 벌써 생선이 다 썩어버려서 썩은 생선만 먹었답니다.
얼마나 산골인지 상상이 가나요? 책보를 메고 10리 길을 걷고 뛰어서 초등학교를 다녔어요.
먹을 것이 없어서 익지 않은 떫은 감을 굵은소금에 찍어서도 먹어봤지요. 옥수수죽도 먹어봤고, 굳어진 분유 덩어리 먹고 배탈도 났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집에 가면 가족들이 “너 용 됐다” 그래요.웃음 그래도 그때가 행복했어요.
종갓집 2대 독자인 우리 형은 그야말로 금지옥엽이었어요. 손이 귀한 집 장남이라 아버지가 정말 잘해줬는데 형은 어렸을 때부터 문제를 일으키고 가출하더니 끝내는 군대에서 탈영까지 했어요.
아버지는 벌어놓은 재산을 형 뒤치다꺼리하는 데 다 쓰셔야 했지요. 결국 형한테 너무 지친 부모님은 하시던 농사도 남에게 다 주고 온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오셨어요.
산골 소년의 상경
서울 와서 산동네 판잣집에서 살았어요. 환경미화원을 하셨던 아버지는 형에게 크게 실망해서인지 “둘째 아들, 셋째 아들한테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