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알자!
일제 강점기 36년간의 굴욕은 일본의 개항과 조선의 쇄국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본만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우리의 문제점을 깊이 느껴보면서 내일의 한일관계도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는 바람에서 개항 전후의 한일 역사를 돌아보는 연재를 시작한다.
지배층과 지식인에게 당시 큰 영향을 미친 미토학의 본고장 미토번(현 이바라키현)의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미국에 굴복하는 것은 신국 일본의 수치다. 전쟁을 각오하고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절대다수의 무사들과 백성들은 그를 영웅시했다. 미토번은 언제든지 쇼군(막부의 우두머리)의 후계자를 낼 수 있는 3대 종실 가문이다. 나리아키는 7대 미토번주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미토학(천왕을 받드는 국수주의 사상)을 완성했다고 평가받는 아이자와 야스시로부터 학문을 배워 존왕사상과 외세의 침략에 대한 방비 의식에 일찍 눈을 떴다.
1804년 맏형이 아버지 뒤를 이어 8대 미토번주가 되었지만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번주에 오른 나리아키는 대대적인 개혁정책을 펼쳤다. 재능있는 중하급 무사들을 적극 등용하고, 이들로부터 번정에 도움이 될 다양한 개혁안을 제안받았다. 나리아키는 중·하급 무사들과 직접 소통했다. 당연히 상급 무사들의 반발이 뒤따랐지만 나리아키는 이들을 설득하며 본격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먼저 번교 홍도관을 설립했다. 홍도관은 약 5만 평의 넓이를 자랑하는 당시 일본 최대의 교육시설로서 존왕양이(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 교육의 산실이 되었다.
나리아키는 불교를 억압하고 신도(일본 고유 민족신앙)를 장려하였다. 당시 불교는 막부 지배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그의 불교적대 정책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그는 번에 내려가면 역사 편찬소와 번교에 들러 학문과 무예 연마를 게을리하지 말 것, 검약과 상무적 기풍을 잃지 말 것을 역설했다. 또 사냥을 빙자한 사실상 대규모 군사훈련을 하기도 했다.
다이묘는 로주가 아니면 막부의 정치에 관여할 수 없는 것이 에도막부의 법도다. 그러나 나리아키는 1839년 쇼군에게 장문의 상서를 올려 일본의 내우외환을 경고하고 정치개혁을 촉구했다. 또 해양 방위를 위해 큰 배의 제조금지를 풀어 줄 것을 주장하고, 에조치(현 홋카이도)개척을 미토번에 맡겨 달라고 요청했다.
1844년 막부는 그에게 갑자기 은거 및 근신 처분을 내렸다. 군사훈련을 한 것, 낭인을 모집한 것, 에조치 개척을 요청한 것, 사원을 파괴한 것 등이 이유였다. 덴포 개혁으로 불과 1년 전에 막부가 나리아키를 포상까지 하지 않았던가? 갑작스러운 번주의 실각에 가신들과 백성들이 막부에 항의하는 소동을 벌였다. 그들은 번 곳곳에서 데모하고 에도로 집단 상경해 막부의 조치를 시정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1849년 나리아키는 5년 만에 복귀했다.
그즈음 에도에는 큰 현안이 있었다. 쇼군 이에사다는 34세로 젊었지만 병약해 후계자 문제로 정계가 둘로 갈라져 있었다. 권력 핵심은 쇼군과 가까운 기슈번의 12살 ‘이에모치’를 밀었고, 다이묘들과 막부 개혁파는 21살의 나리아키의 친아들 ‘요시노부’를 지지했다. 나리아키는 요시노부를 쇼군에 등극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인물만 보면 요시노부가 훨씬 경쟁력이 있었지만 막부가 버거워하는 나리아키의 아들이라는 점이 결국 쇼군 탈락의 원인이 되었다.
쇼군 후계자 문제에서 허를 찔린 나리아키를 비롯한 개혁파 다이묘들은 에도성에 몰려들어 항의했으나 막부는 허가 없이 에도성에 들어왔다며 오히려 이들을 처벌했다. 이로써 나리아키는 두 번이나 막부로부터 근신 처분을 받았으며 다음 해 미토번 칩거 처분을 받고 에도를 떠나야 했다.
나리아키는 시호가 ‘열공’(熱公)인 데서 알 수 있듯이 막부 말기 정치에 있어서도 강력한 리더십과 통찰력을 발휘했고, 여자 문제와 자녀 생산에도 정열적이어서 자녀를 37명을 두었다. 자식들이 많다 보니 다른 집안의 양자로 많이 보내 번주가 되거나 가문의 당주가 되도록 했다. 그 전략이 통해 그의 사후 히토쓰바시 가문의 당주가 된 아들 요시노부가 결국 마지막 쇼군이 되었으니 지하에서라도 흐뭇해하지 않았을까?
박경민 경영컨설턴트